농민운동 ()

사회구조
개념
농민의 권익을 위하여 농민이 조직적으로 전개하는 사회경제운동.
정의
농민의 권익을 위하여 농민이 조직적으로 전개하는 사회경제운동.
개설

농민은 농토 위에 생존하기 때문에 농민의 권익 가운데 농토의 소유와 농산물의 분배상 권익이 기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농토의 소유와 농산물의 분배에 있어, 농민 또는 농업 이외의 다른 이유에 의하여 모순이 생기면 그 모순의 배제와 시정을 위하여, 농민은 힘을 결집하여 조직적으로 대항하게 된다.

농민은 오랫동안 농업 이외의 이유로 구속되어 왔다. 농민은 고대나 중세사회에서 봉건적 이유로 농토도 갖지 못하고 농산물도 마음대로 갖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농민은 이러한 모순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근대사회가 태동하면서, 우리 나라의 경우 양반봉건사회가 무너지면서 농민은 봉건적 모순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각한 농민이 집단을 이루어 봉건적 모순에 저항하며 개혁운동을 폈으니 이것이 농민운동의 출발이다.

농민이란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의 제3계급인 농공상에 종사하던 상민(常民) 중의 하나이다. 상민은 양반과 중인 다음의 신분계급으로 사회적 구실로 보면 생산담당계층이었다. 상민 다음에는 천민이 있었다. 그런데 천민 가운데의 노비들은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독립된 농가를 갖게 되는 경우가 증대하여 농민화되어갔다.

즉, 공사노비로서 자식을 가지게 되면서 노비의 수가 증가하자 노비출신이지만 노비생활을 하지 않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가령 노비인 부모는 주인의 토지를 얻어 자식들을 농민으로 키워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민과 노비는 실제를 구별할 필요없이 상놈[常漢]으로 통칭되고 있었다.

한편, 양반이나 중인에서도 경제적으로 몰락한 잔반(殘班) 등의 농민이 있어 조선 후기에는 농민의 수가 전체 인구의 9할에 가까웠다. 그 9할의 농민이 봉건적 사회경제체제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농민운동의 대두

봉건체제와 그의 붕괴과정 속에서 농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는데, 효시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그 전에도 봉건적 압제에 대하여 항쟁하였지만 그것은 민란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민란은 그 자체가 목표하는 사회적 이념 없이 감정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반항으로서, 고대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었던 일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특히 후삼국 때의 농민반란부터 1862년 삼남민란(三南民亂)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민란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봉건적 압제나 착취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란이었기 때문에, 농민운동으로 규정할만한 것은 못 된다.

삼남민란의 경우는 당시 조선왕조의 봉건체제가 무너지던 때였으므로 전근대적 민란과는 다른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말하자면 농민의식이 성장한 특징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삼남민란은 민란에서 농민운동으로 발전해가는 과도기적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860년대에는 농민의식이 성장하고 있던 징후를 두 가지 역사적 사실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1862년의 삼남민란이고, 다른 하나는 민교(民敎)로서 동학교의 발생과 전파이다. 처음에는 두 가지의 일이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어 발생한 것은 아니었으나, 1870년대에는 농민문제에 관한 공통성 때문에 합류하여갔다.

1871년의 이필제(李弼濟)의 난에서 1893년의 익산민란까지 20년간의 민란은 두 가지의 농민운동 지향성의 합류가 시도된 민란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동학교도가 관여했다지만 동학교도의 조직이 동원된 것은 아니었고, 또 봉건적 모순에 대한 반항 즉 부정적 논리만 있었고, 긍정적인 사회이념의 논리는 없었다.

그러므로 농민운동으로까지 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봉건사회의 말기적 민란이 동학교도와의 관계 위에서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은, 조만간에 대두할 농민운동 역시 동학과의 관계 위에서 일어날 가능성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운동도 그 전 해에 있었던 익산민란과 같이 고부민란에서 점화되었다. 그러나 곧 동학교의 조직이 동원되어 농민운동의 조직으로 발전하였고, 주장하는 목표가 봉건적 모순의 부정뿐만 아니라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에서 보듯이 근대적 인권의 주장이나 토지의 균작을 요구하는 등 근대적 지향을 이념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때를 농민운동이 본궤도에 올라선 시기로 잡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 농민운동은 동학과 민란이 합류하여 동학농민혁명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출발하였는데, 처음에는 주로 봉건체제에 대한 개혁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혁명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이 침입하여 농민혁명군을 탄압하자 혁명운동은 혁명전쟁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 뒤 일본제국주의가 침략을 심화하였으므로, 그때까지의 반봉건적 농민혁명운동에 앞서 제국주의 침략에 항전하는 반제국주의적 독립운동의 양상으로 변질되어갔다. 동학농민이 혁명전쟁 직후에 의병농민으로 변천하였던 사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농민운동은 본질적으로 농민의 권익을 위하는 것이므로, 일제의 식민통치기간이라고 해서 봉건적 착취를 방관할 리는 없었다. 따라서 민족항일기의 농민운동은 식민권력에 항전하면서 한편으로는 식민권력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봉건적 식민성 지주에 대하여 항쟁하는 이중적 성격을 보이고 있었다.

제국주의는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는 것이 본질이다. 일본제국주의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일제가 우리 나라에서 겨냥한 경제적 이득 가운데 주된 것이 농업수탈을 통한 이익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소위 토지조사사업의 선행작업으로서 제실소유토지(帝室所有土地)와 관유토지(官有土地)를 조사하였고, 1910년 국권을 탈취하자 곧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강행하여 농업수탈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77.2%의 농민을 소작농으로 전락시켜 지주적 수탈로서 제국주의 이득을 취하여갔다. 즉, 3.1%의 지주가 50.4%의 농토를 지배하는 대신 자작농은 19.7% 밖에 안 되었던 반면에 자소작농(自小作農)이 39.4%, 순소작농이 37.8%로 77.2%의 농민이 소작농민으로 수탈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식민성 지주와 소작농으로 양극화된 사회구조는 1920년부터 10여 년간 실시한 산미증식계획이라는 것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그리고 비례세제가 강행되어 자작농은 더욱 몰락하였으며, 농민운동은 소작농민이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소작쟁의가 한국농민운동의 주요 맥락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한국농민운동은 처음에는 봉건체제에 항거하여 일어나 곧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독립운동으로 변질되어갔다는 점,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독립운동의 한편에서는 봉건적 잔영을 타도하기 위하여 싸웠으니 결국 이중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 또 소작쟁의가 농민운동의 주류를 이루었다는 점 등이 특색이다.

그리고 민족항일기에 농민운동이 크게 고조된 것은 사실이나 그의 역량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지식청년이나 도시의 인사가 농민운동을 지원하거나, 농민의 역량을 증진시키기 위해 계몽운동과 같은 농촌운동이 활발하였던 점도 농민운동의 외곽적 성격으로 함께 주목할 일이다.

농민운동의 변천

동학농민혁명운동부터 1990년대까지 농민운동의 변천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학농민혁명운동

동학교는 발생부터 사회사적 측면에서는 농민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동학교운동을 통틀어 동학농민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1894년의 것만을 가리킬 때는 동학농민혁명운동이라 하는데, 이 운동은 내용의 변화에 따라서 다섯 단계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첫째는 전봉준(全琫準)을 선두로 한 고부민란의 단계로서 이것은 익산민란과 같은 성격이었다.

둘째는 동학교조직이 합세하여 관군에 항거하면서 전주를 점령할 때까지의 일로서 여기에서 동학농민혁명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셋째는 전주화약(全州和約) 이후 집강소(執綱所) 통치기간으로서 전라도에서나마 농민의 혁명이념이 실현되어가던 기간이었다.

넷째는 혁명전쟁이 전개되던 기간으로 그 해 10월 동학혁명군을 탄압하는 일본군에 대항한 혁명전쟁을 일으켜 북진한 동학농민군이 12월 우금치(牛金峙)에서 패퇴할 때까지의 일이다.

다섯째는 12월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패퇴한 농민군이 곳곳에서 항전한 기간으로 일본침략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무참하게 학살된 기간이었다.

여기에서 셋째 단계까지가 혁명운동 기간이었고, 넷째와 다섯째의 단계는 혁명전쟁 기간이었는데 이를 전기와 후기로도 나눈다.

혁명전쟁이란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반혁명적 외국군(일본군)의 침입이 있을 때, 혁명군이 혁명의 완성을 위하여 침략군과 벌이는 전쟁을 말한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운동은 12개 조의 폐정개혁안 즉, 농촌의 혁명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농민운동사적 의미가 크며 농민운동을 본격화한 점, 집강소 통치를 시도한 점, 혁명전쟁으로까지 항전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의병농민운동

동학농민의 많은 수가 혁명전쟁에서 무참하게 학살되자 나머지 대부분의 농민은 잠적하고 말았다. 하지만 1896년부터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잠적하였던 농민이 그 의병들과 합세하여 침략군과 싸웠다. 이 때의 농민은 동학조직을 파괴당한 형편이었으므로 순수한 농민의 처지에서 참여하였다.

그런데 을미의병은 위정척사적(衛正斥邪的) 유생이 주도한 것이었으므로 농민의병은 그 유생들에 의지한 잠적성 또는 용병적 관계에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이 때의 의병운동은 농민의 독자적 또는 주체적 운동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의병운동이 고조되면서 농민이 주도한 경우가 많게 되었다. 여기에는 광무농민운동(光武農民運動)에 의하여 농민의 역량이 성장한 농민 자체의 이유가 컸다. 1896년 여름, 을미의병이 해산한 뒤에 의병농민은 다시 독자적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 남학당(南學黨)·영학당(英學黨)·활빈당(活貧黨) 등의 조직을 만들어 산적(山賊)의 모양으로 항전한 농민도 많았다.

이 무렵 그들의 반봉건적 농민운동과 광무정권의 개혁사업으로 양전(量田)과 지계사업(地契事業)의 부패에 항전한 정산민란 등의 항쟁을 광무농민운동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성격의 운동은 1897년부터 1904년까지 계속되었다. 광무농민운동은 1904년부터 의병운동으로 전환하여 의병운동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하였으니 신돌석(申乭石)의 의병이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또, 뒤이어 일어난 유생주도의 의병과 합류한 경우도 많았는데, 이 때에는 을미의병처럼 종속적이거나 용병적 관계가 아니라 유생과의 주체적 협상에 따라 참여한 사례가 많았다. 이것은 그동안 농민의 주체적 역량이 향상된 것을 뜻한다.

그런데 정미의병부터는 농민이 주도한 의병진영이 많았다. 이것은 해산군인이 참전함으로써 종래 양반유생의 의병활동이 퇴색하고 평민의 소임이 증대되어 의병대열에서 봉건적 분위기가 사라져 갔다는 점, 신돌석 등의 농민의병의 활약이 국민의 주목과 찬사를 받았던 점, 의병전쟁이 유격전으로 변화하면서 농민의 참전이 요구되었다는 점, 1907년 이후 친일지주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그에 대한 농민의 응징이 촉구되고 있었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농민의 민족의식이 성장하여갔던 점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토지조사에 대한 항쟁

지금까지의 의병전쟁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독립군의 조직과 의협투쟁(義俠鬪爭)으로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일제가 1910년부터 토지조사사업이란 명목으로 투탁지(投托地)와 도지(睹地)나 동유지(洞有地) 등을 국유지로 약탈하였을 뿐 아니라, 1914년부터는 그 국유지의 소작료를 인상하여 수탈하자 농민은 토지조사에 대한 항쟁을 벌였다.

1910년대 도처에서 일어난 민란이 그것을 말하지만, 또 토지약탈에 대항하여 소유권분쟁이 격렬하였던 것도 당시의 사정을 전하여준다. 당시 토지조사로 인한 분쟁이 10만 필지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서 소유권분쟁이 99.7%나 되었고, 그 가운데 65%가 총독부 소유지인 국유지분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농민의 항쟁은 모두 일제의 식민권력으로 탄압된 채, 앞에서 언급한 77.2%의 농민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한 가운데 농민의 민족의식은 더욱 높아갔다. 그러므로 3·1운동을 전민족항쟁의 독립운동으로 대중화시켜갔던 것이다.

소작쟁의

일제하의 농촌구조는 식민성 지주와 소작농이 양극화된 속에 77.2%의 소작농민이 수탈되고 있던 것을 기본으로 한 것이었고, 이러한 구조적 모순은 1920년대의 산미증식계획이라는 쌀수탈증대계획과 비례세제(역누진세)로 말미암아 더욱 심화되었다(소작농이 더욱 증가하여갔다).

따라서 일제하의 농민운동은 소작쟁의를 중심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소작쟁의는 1919년 황해도의, 일본인이 경영하던 흑교농장(黑橋農場)에서 일어난 것이 기록상 최초의 것이다. 그 뒤 1939년 소작료통제령(小作料統制令)이 나와 소작쟁의가 봉쇄될 때까지 해마다 증가하고 있었다.

소작쟁의가 해마다 증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일제가 지주적 수탈체제를 기반으로 한 식민통치를 강행함으로써 한국농민의 8할 가량이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소작농의 문제가 곧 민족문제로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1914년 이후, 종전에 3할에 머물러 있던 역둔토(驛屯土)와 궁장토(宮莊土) 등 이른바 국유지에 대한 소작료를 5할로 인상하였다. 그 뒤 소작료가 7할 전후로 올라 1922년 진주 소작노동자대회에서는 소작료를 5할로 내려 달라고 요구할 정도였고, 1929년 용천(龍川)의 불이농장(不二農場)에서는 수 년간의 소작쟁의 끝에 조정된 소작료가 5.8할일 정도로 가혹하였다.

셋째는 동양척식주식회사나 불이흥업주식회사 같은 농업회사 외에도 농업수탈은 물론, 고리대금 등으로 소작농민을 착취하고 있었던 점, 그리고 소작농은 수리조합비(대개 1단보당 0.5가마니)·비료대·운반비, 그 밖에 공과금까지 부담하였고, 봉건적 착취도 남아 있어 무상으로 노역까지 제공할 정도로 착취받고 있던 점이다.

넷째는 이러한 수탈과 착취는 이른바 산미증식계획으로 심화되어 갔는데 순소작농민도 42.8%로 증가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대량의 쌀을 일본으로 유출하여 농촌에는 절량농가가 속출하고 있었다는 점 등이다.

1932년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의하면 48.3%의 농가가 절량농가였고, 그 가운데서 소작농이 많은 남한지방의 절량농가는 55.5%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국농민의 생존방안은 소작쟁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소작쟁의는 1920년대초에는 소작료인하를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 중반기에는 소작권의 보장과 공과금 및 잡부담의 면제를 요구하는 것, 후기에는 수리조합과 지주, 그리고 마름[舍音]의 횡포를 규탄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쟁의방법은 처음에는 농성시위가 일반적이었으나 후반기로 가면서 농업회사나 수리조합사무소 및 지주의 집을 부수며 항전하다가, 1930년 전후에는 지주를 옹호하는 면사무소와 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격렬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때에는 자작농도 소작농과 합세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는데, 그때 각 지방의 소작회는 자작농까지 합류한 농민조합으로 개편되어갔다.

지방농민조합의 중앙기관은 1927년에 결성된 조선농민총동맹이었는데, 중앙조직은 거의 활동하지 못하였고 지방의 농민조합이 독자적으로 활동하여 식민농업정책에 항거하며 싸웠다. 이러자 일제는 <조선소작조정령>(1932)과 <조선농지령>(1934)을 만들어 소작쟁의를 봉쇄하려고 하였다.

즉, 식민적 농업구조인 지주와 소작관계를 법률로 규정하고, 소작쟁의는 그 법에 의한 재판 절차로 묶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소작농민은 법원까지 갈 여비나 소송비용이 없었으며, 있다고 해도 몇 달을 끌면서 지주를 옹호한 당시의 법과 법원의 재판을 받는 것이 무의미하였다.

따라서 1930년대 중반기의 소작쟁의는 처음부터 일제의 관공서를 습격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근본적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제거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는 의식에서 항쟁한 것이다.

일제는 1939년 <소작료통제령>을 만들어 강제적으로 소작쟁의를 봉쇄하였는데, 이 통제령은 1938년의 <국가총동원법>을 모태로 한 것이었으므로 그것을 위반하면 모법에 따라 감옥에 보냈다.

이 때문에 그 뒤의 농민운동은 소작쟁의를 앞세우지 않고 독립운동의 항쟁방법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일제의 패망기에 농촌에 있었던 비밀단체나 개별항쟁은 거의 그러한 성격의 것이다.

협동조합운동

협동조합운동은 자작농이나 자소작농에 의하여서 전개된 농민운동이었다. 소작농처럼 경제력이 전혀 없는 농민은 참가할 수 없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자작농이라 해도 경제력이 빈약하였기 때문에 신용조합같은 것은 불가능하였고, 영세적인 생산조합의 성격인 공동경작계나 약간의 소비조합이 있을 정도였다.

1920년대 후반기에 일어난 협동조합운동은 1926년에 일어난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 1928년부터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의 농촌사업으로 추진한 협동조합운동, 1931년 천도교 조선농민사의 농민공생조합(農民共生組合)이 그것이다.

조선농민사에서는 1925년 발족할 때부터 그의 부서로서 알선부를 설치하고 소비조합운동의 선구적 구실을 하였고, ≪조선농민≫에서는 1928년부터 협동조합의 계몽적 논설과 해설을 게재함으로써 협동조합운동을 촉진하고 있었다.

민족항일기의 농민이 협동조합운동을 편 것은 식민경제에 희생되지 않는, 농민의 자립을 목표로 한 것이었으나, 자작농이나 자소작농이 몰락하고 있었으므로 성공할 수가 없었다.

협동조합운동의 지역분포를 보면 협동조합운동사는 경상도에서, YMCA의 운동은 경기도에서, 농민공생조합운동은 북한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 공생조합운동은 조선농민사의 지원을 받았는가 하면 자작농이 많던 북한지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가장 많은 지역에서, 가장 오랫동안 버티어나갔다.

귀농운동

협동조합운동은 농민운동과 농촌운동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농촌운동으로 농민운동과 관계가 깊은 것은 귀농운동(歸農運動)이었다. 귀농운동이란 도시의 학생이나 지식인이 사회문제에 대한 지성적 각성을 가지고 농촌으로 들어가 농민을 위하여 농민문제 해결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귀농운동’이라는 용어는 ≪조선농민≫ 1926년 7·8월호를 ‘귀농운동호’라는 제호로 특집을 꾸민 데서 널리 알려진 것 같다. 따라서 귀농운동은 그 전후에 산발적으로나마 크게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직적으로 추진한 것은 1929년 조선일보사의 문자보급운동과 1931년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운동(vnarod運動)에서 본격화되었다. 브나로드운동은 농촌계몽운동이라고 바꾸어 불렀지만, 두 언론기관이 함께 방학을 맞은 학생을 동원 또는 지원하여 귀농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농민의 계몽으로서 문맹퇴치, 농사개량, 민족의식의 고양 등을 도모하였으며, 한편 농민과 함께 농사를 하며 함께 울고 웃는 민족의 광장이 마련된 귀농운동의 장면이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전반기에는 농촌마다 학생계몽반이 밤낮으로 활동하는 광경으로 메워졌다.

따라서 민족의 현실과 장래를 염려하는 애국열성이 솟구쳤는데, 일제는 1935년부터 귀농운동을 금지시키고 말았다. 이 때문에 두 신문사의 계몽운동이 금지되어 그 뒤 산발적인 것만 남게 되었지만, 이러한 귀농운동으로 학생들이 농촌문제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민족적 정열을 높이게 되었으며, 농민은 농민의식과 민족의식을 드높이게 된 것은 큰 수확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의 농민항쟁

1938년 <국가총동원법>과 1939년 <소작료통제령>으로 농민운동이나 농촌운동이 모두 금지되고, 1938년에는 <국민징용령>에 따라 농민을 그들의 전쟁인력으로 끌어가는 한편, 지금까지 쌀 1,000만 석을 빼앗아가던 것도 모자라 공출(供出)로서 쌀뿐 아니라 그릇이나 칡덩굴까지 거두어가던 때였다.

징용에 100만 명, 징발에 35만 명, 보국대는 형무소 수감자까지 동원하였으니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1944년 미곡공출량은 생산량의 63.8%에 이를 정도였다. 그리하여 농촌의 인력과 물자자원은 완전히 고갈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어떤 조직을 유지시켜 나가기란 불가능하였다. 그러므로 징용과 공출에 항거하다가 형무소로 잡혀 갔고, 형무소에서 다시 보국대(특히 남방보국대)로 끌려갔다.

때문에 이때의 농민항쟁은 오히려 징용이나 징발 또는 보국대의 노무현장에서 일어났다. 노동현장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노동운동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으나, 그것은 농민운동이 연장되었다는 성격이 짙었던 것이다.

한편 곡식과 그릇 그리고 젊은이까지 모두 빼앗긴 농촌은 이제 농민운동의 조직이 발생할 기반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경산의 ‘결심회’(또는 죽창의용대)를 비롯하여 양평의 ‘농민동맹’이나 봉화의 ‘자유청년연합회’같은 농민조직이 극비리에 생기고 있었다. 그리고 울진의 ‘창유계(暢幽契)’처럼 계모임을 가장한 조직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징용 등에 반발하고 농민의 독립의식을 제고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농민운동단체

농민운동이 변천함에 따라 농민운동단체의 조직도 활발하게 추진되었고, 또한 여러 가지의 변천을 보였다. 한말에도 소작회 등의 단체가 있었으나, 농민운동이 사회경제운동으로 본궤도에 오른 3·1운동 후에 농민운동단체도 본격적인 탄생을 보게 되었다.

즉, 한말의 농민운동은 동학이나 의병의 조직을 통한 것이어서 조직성격의 측면에서 보면 아직 미분화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3·1운동 뒤 소작쟁의에서 보듯이 농민이 농민의 권익을 위하여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투쟁을 전개하면서 농민의 독자적인 운동단체가 탄생하였다.

전국적으로 조직돼 있던 소작회·소작인회·소작동맹 등의 소작농민단체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 밖에 천도교의 조선농민사가 조직되어 있었고, YMCA의 협동조합이나 전진한(錢鎭漢)의 협동조합운동사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YMCA의 협동조합이 미국의 선교사업 등, 종교단체나 지식청년에 의한 운동은 계몽주의적 성격이 짙었다. 다만 조선농민사의 경우, 지방에 따라 일정하지 않아 그 중에는 농민주체적인 것도 상당히 많았다.

한편 소작회의 조직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자 그에 관심 있는 인사들이 전국적으로 계열화된 농민운동조직을 구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소작농민이 임금노동자와 같다고 하여 소작노동자라고 부르며,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나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 등의 노동단체가 소작농민의 농민운동을 관장하기도 했으나, 노동자의 성격을 벗어나야 한다는 이론이 일어나 1924년에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을 결성하였다. 다시 1927년에는 노동운동과 분리하여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이 조직되었으며, 그 지방조직은 농민조합으로 일컬어졌다.

농민조합은 1930년대에 크게 발달한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변천하는 동안 각종 성질상의 변화도 있었으나, 공통된 것은 어느 것이나 중앙조직은 지식인의 관여가 많은 것이어서 순수한 농민조직은 아니었다는 점이며, 농민주체적 조직은 소작회나 농민조합뿐이었다.

농민운동단체가 지식인에 의하여 운영된 경우 농민의 권익이나 이해보다 지식인의 이해와 상관하여 운영됨으로써 혼란이 일어났다. 민족항일기의 농민운동단체가 사상논쟁에 휘말려 각종 복합성을 보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농민운동단체는 1935년경에는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을 표방한 마을단위의 농촌진흥회에 눌려 쇠퇴하였으며, 1938년 <국가총동원법> 앞에서는 표면상 남아 있을 수 없었다.

끝으로 주의할 것은 농민단체에는 일제의 주구적 단체도 있었다는 점이다. 소작인의 단체도 송병준(宋秉畯) 같은 지주가 결성한 소작인 상조회가 있었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농장에도 소작회·소작인회 등의 조직이 있었다. 이들 조직들은 식민성 지주들의 앞잡이로 조직되었던 것이다.

또 지주들의 모임인 지주회·농사장려회·권농회 등이 있었고, 관제조직으로서 조선농회(朝鮮農會)가 있었으며, 1932년 이후에는 농촌진흥회가 전국적으로 결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식민적 단체를 농민운동단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광복후의 농민운동

농민운동은 일제 말기에 잠복기로 접어들었지만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농민운동은 정치무대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농민운동조직은 ‘전국농민총연맹(全國農民總聯盟)’이었다. 전국농민총연맹은 해방된 지 3개월 여만에 조합원 330여만 명을 지닌 최대의 농민조직이었다.

이 단체에 대항하는 대한독립농민총연맹(大韓獨立農民總聯盟)도 1947년 8월에 조직되었다. 대한독립농민총연맹의 농민운동은 특기할 만한 것이 없었다.

농민들은 자치권력의 씨앗이었던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에도 열심히 활동하였다. 해방공간에서 농민운동은 다른 사회운동과 함께 공동으로 소작료 인하, 토지개혁, 양곡수집반대, 친일잔재 청산, 미군정 관료기구의 억압적 권력행사 반대 등 다양한 사회운동을 펼쳤다.

해방공간의 격렬한 농민운동 때문에 1950년의 농지개혁은 다른 제3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농지개혁은 지주계급을 타파하였고 농민운동의 급진적 변혁요구를 체재내로 수렴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때 농지개혁은 소작답의 소작인에게 우선권을 주었고 또 유상분배방식에 따라 수행되었기 때문에 빈농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6·25전쟁기에 북한군이 진주한 곳에서는 빈농들이 주도하는 토지개혁이 실시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6·25전쟁이 다시 남북분단으로 고정되면서 급진적 농민운동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급진적 농민운동이 타격을 받자 비급진적인 농민운동도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즉, 6·25전쟁이 농민운동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첫째, 6·25전쟁으로 인해 계급적 농민운동은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둘째, 6·25전쟁 동안에 계급적 농민운동의 지도자들이 농민운동에서 사라졌다. 이들은 죽거나 체포, 구금되었으며 일부는 월북하기도 하였다.

셋째, 전쟁으로 인해 반공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면서 농민들은 대안적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되었다.

넷째, 전쟁기간 동안 일어난 피해 때문에 한국농민들은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운동조직은 자발적으로 결성될 수 없었다. 다만 대한독립농민총연맹이 1952년에 대한농민회(大韓農民會)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도 농민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농민운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6·25전쟁 후 농민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운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정권의 지지기반으로 이용되었다. 대표적인 농민조직인 농업협동조합(農業協同組合)이 정부에 의해 1958년에 조직되고 농민을 통제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농업협동조합은 5,16군사정변 이후 농업은행과 합병되어 종합농협으로 조직상의 발전을 이룩하지만 여전히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1970년대 이후 농협의 민주화는 농민운동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1960년대 초에 농업발전의 대안으로서 협업농장운동이 전개되어 몇 개의 농장이 설치되었으나 농민운동으로서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960년대의 농민운동은 가톨릭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는 1964년 10월에 ‘농촌청년부’를 신설하였다. 1966년 8월에는 농촌청년부를 분리, 독립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이리하여 같은 해 10월에 한국가톨릭농촌청년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이 조직은 1960년대 이후 한국농민운동의 조직적 기반을 닦았다. 이 시기 농민운동의 목표는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적 인격을’ 형성하게 하고 주위환경을 개선하여 ‘새로운 마을’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느님 뜻에 맞는 새로운 농촌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농촌청년들에게 기술교육, 협동교육, 인간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종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조운동이었다.

한국가톨릭농촌청년회는 1972년에 한국가톨릭농민회로 이름을 바꾸어 농민운동을 강화해 나갔다. 청년운동으로부터 농민운동으로 그 성격을 강화해 나갔다. 이 시기부터 한국가톨릭농민회는 전국 수준에서나 농촌지역사회 수준에서 주요 농민운동단체로 급성장하였다.

1970년대 중반에는 개신교계에서도 농민운동조직이 태동하였다. 크리스찬 아카데미,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등이 촉매역할을 하였다. 특히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1970년대에 농민교육을 통해 농민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기독교농민운동활동가들은 민중신학의 이론적 도움을 받으면서 기독교 사회운동세력의 지원을 받아 농촌교회 평신도, 농촌교회 청년, 그리고 비신자 농민 등이 함께 참여하는 기독교 농민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1978년 3월에 ‘전남기독교농민회’를 창립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전국기독교농민회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1970년대에 오면 대외의존적 공업화로 말미암아 농촌문제와 농업문제가 큰 사회문제로 등장한다. 정부는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 농촌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정부는 당시 농업과 농촌이 안고 있는 문제를 농민들의 ‘근면·자조·협동’으로 해결해 보고자 하였다.

이에 대해 농민운동단체들은 사회구조의 개혁을 통해 농업문제와 농민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사라졌던 대자적(對自的) 농민이 다시 등장한 셈이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농민운동 사업은 ‘농협민주화운동’·‘쌀생산비보장운동’이었다.

1976년 11월부터 1978년 4월까지 계속된 ‘함평군 고구마피해 보상운동’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운동이다. 1970년대 농민운동의 방법은 실태조사, 보고서작성, 교육, 연구토론회, 세미나 조직, 서명운동, 건의문 작성, 집단항의방문, 기도회, 단식농성 등이었다. 1980년대의 농민운동에 비하면 상당히 온건한 방법들이었으며 교회의 역할이 매우 컸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영향을 받아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시민운동 등이 1980년대에 급격히 확산되고 성장하였다. 농민운동에서는 기존 종교계의 조직들이 꾸준히 성장하는 한편 비종교적 농민운동조직도 등장하였다. 비종교계 농민운동조직들은 기존의 종교계 조직과 구분하기 위해 스스로를 ‘자주적 농민운동조직’이라고 불렀다.

교회가 농민운동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농민운동을 목표로 하는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농민운동조직으로서는 한계를 지녔다. 농민운동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1970년대말부터 이 문제를 지적하면서 운동을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1985년 4월 ‘함평농우회’로 첫 결실을 맺었다.

함평농우회를 시발로 ‘자주적 농민운동조직’은 확산되어 1987년 하반기에는 전국 30 여개 군에 군단위 ‘자주적 농민운동조직’이 창립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1987년 2월에 전국농민협회가 결성되었다.

이리하여 전국 수준에서는 기존의 종교계 2개 조직과 함께 모두 세 개의 전국농민운동조직이 존재하게 되었다. 한편 이 세 조직에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군단위 농민운동조직도 존재하였다. 때로는 한 군 안에 서로 다른 농민운동조직이 2∼3개 존재하여 농민운동의 힘을 분산시킨다는 비판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여 한국가톨릭농민회와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는 1989년 3월에 전국농민운동연합이라는 통일조직을 결성하였다. 다시 1990년 4월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창립되어 농민운동조직이 전국 수준에서 하나로 통일되었다.

1980년대의 농민운동 목표는 반독재, 반독점, 반외세, 민족통일이라는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띄었다. 수입개방과 맞물려 반외세 투쟁을 가장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1985년의 소값 피해보상 및 외국농축산물 수입저지운동은 소떼를 몰고 항의시위를 하여 소몰이 싸움이라고 불리는데 1980년대 사회운동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때 농민들은 미국농축산물수입문제와 직접 관련이 없는 문제 예컨대, 핵무기, 미군철수, 팀스피리트훈련 중지, 평화협정체결, 국방비 삭감 등의 문제까지도 제기하였다.

반독점, 반독재 운동은 민중민주주의 이념으로까지 전개되고 있었다. 1980년대의 농민운동은 노동운동, 학생운동, 시민운동과 함께 힘을 합해 1987년의 민주화를 성취하였다. 사회민주화는 농민관련 단체의 민주화도 가져왔다.

한편, 투쟁 중심의 농민운동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1987년 선거에서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 국회의원 선거에 농민대표를 내 보낼 것인가 등이 논의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사회민주화로 말미암아 1990년대의 농민운동은 방향전환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에 들어 농민운동 지도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국회와 지방의회에 의원으로 진출하였으며, 정부도 농업정책 수립에서 농민단체의 의견을 어느 정도 수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정부가 농민운동 지도자들을 특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저항과 투쟁 일변도의 농민운동은 그 의미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투쟁 못지않게 작목반, 영농조합법인, 협동조합운동 등 경제분야의 운동이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또 성장주의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농업가치를 발견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이미 종교계에서는 새로운 운동을 모색하고 있다. 가톨릭농민회와 한국기독교농민회는 선교단체로서의 성격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1990년 가톨릭농민회는 생명운동과 공동체운동을 새로운 진로로 책정하고 도농직거래운동, 우리밀 살리기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한국기독교농민회도 정의, 생명, 공동체 운동을 강조하게 되었다.

1990년대 농민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1993년 12월에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이다. 우루과이라운드를 반대하는 운동에는 농협이 선두에 섰다. 농협은 우리 몸에는 우리 농산물이 좋다라는 뜻의 ‘신토불이(身土不二)’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농민운동단체들도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결국 우루과이라운드는 타결되고 WTO체제가 수립되었다. 따라서 그 동안 정부가 공식적으로 견지해 왔던 농업보호론은 이제 설 자리가 없어졌다. 농산물의 비교역적(非交易的) 특성을 인정하지 않는 WTO체제 하에서 농업은 ‘무한경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 정부는 농업구조개선, 신농정 등을 통해 농민의 불만을 막아보려고 시도하였다. 신농정의 금융지원을 받아 농민들은 앞다투어 시설 농업에 투자하였다. 그런데 1997년말 IMF관리체제로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농민들이 파산 상태에 이르러 신농정은 농민운동의 비판대상이 되고 있다.

앞서 종교계 농민운동의 새로운 움직임을 지적하였지만 비종교계의 농민운동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농업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려는 운동을 들 수 있다. 과거에는 식량의 자급자족 즉, 식량안보라는 측면을 강조해 왔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환경적 가치, 국토보전기능 등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국토공간을 가꾸는 산업으로서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농민운동은 농민권익보호운동 뿐만 아니라 도시인과 함께 하는 운동이 전개될 것이다. 예컨대 유기농산물운동, 도농직거래운동, 도시인의 체험농업운동, 유전자조작식품 반대운동 등이 전개될 것이다.

또한 농민들의 소비수준이 높아지고 생산자재의 투입이 높아짐에 따라 농촌소비자운동도 활발해질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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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한국농민운동사』(조동걸, 한길사, 1979)
「한국농민운동사」(유세희, 『한국현대문화사대계』 Ⅳ,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8)
『주요농민운동단체의 형성과 전개과정』(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95)
「한국의 농민운동과 국가-1964∼1990-」(김태일, 고려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1)
「농민운동의 전개와 새로운 과제」(윤수종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농민과 사회 』, 1997년 가을)
「식품체계의 재구조화와 신토불이운동」(한도현, 『우리 농산물 애용 운동과 아이덴티티 정치』, 문학과 지성사, 2000)
집필자
조동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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