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측우대는 1770(영조 46) 청동제 측우기와 함께 제작된 것으로서, 본래는 대구감영(大邱監營) 선화당(宣化堂)에 있었다.
대석의 앞면과 뒷면의 중앙부분에는 ‘측우대(測雨臺)’, 뒷면의 왼쪽에 ‘乾隆庚寅五月造(건륭경인오월조)’라고 뚜렷이 음각되어 있다.
『영조실록』 권114 정축조(丁丑條)에 의하면, “세종조의 구제(舊制)에 따라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과 경희궁의 양궐과 8도 양도(兩都)에 모두 제작, 설치하여 우량(雨量)의 다소를 측정하게 하였고, 양운관(兩雲觀)이 모두 높이 포백1척(布帛一尺), 길이 8촌(寸)의 석대를 만들고 대 위에 길이 1촌의 원혈(圓穴)을 파서 측우기를 올려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측우대의 높이는 46㎝, 너비는 37㎝, 지름는 16㎝, 길이는 4.3㎝이다.
1917년 『조선고대관측기록보고』에 따르면, 영조 46년에 제작된 측우기는 모두 7기(器)가 있었다. 그 중 대석(臺石)만 남아 있는 것이 4기(基)가 있었으나, 현재 측우기는 모두 없어지고, 대석도 대구선화당 측우대 하나만 남아 있다.
이 측우대는 제작연대가 뚜렷하고 실록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것으로서, 과학문화사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