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삼한의 여러 소국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는데, 나라 이름들의 한자 표기는 당시의 중국 상고음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한자음은 중국 고대음에 가깝기 때문에 삼한 소국의 위치를 비정하는 데 참고가 된다.
‘대석삭국’은 그 앞에 열거된 마한 소국 이름에 소석삭국(小石索國)이 있어, 서로 관련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대’와 ‘소’는 ‘석삭국’에 붙인 형용사임을 알 수 있다.
‘석삭국’의 ‘석(石)’은 중국 고음이 ‘ziak’, 북경음이 ‘si’이다. ‘삭(索)’은 중국 고음이 ‘sak’, 북경음이 ‘so’이다. 이처럼 ‘석삭’의 중국 고대음은 우리 나라의 한자음에 가깝지만, 비정할 만한 지명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의 경기도 지방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남양도호부조(南陽都護府條)의 고적(古蹟) 항에 “부(府)의 서쪽 33리(里)에 석산성(石山城)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 석산성이 ‘석삭국’ 영역에 있던 산성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개로왕(蓋鹵王) 18년(472)조에 백제가 북위(北魏)에 보낸 국서 가운데 “지난 경진년 후에 신(臣)의 서계(西界)의 소석산 북쪽 바다에서 시체 10여 구를 발견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국서는 5세기 후엽의 것이기는 하지만, 백제의 서계에 ‘소석산(小石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백제는 지금의 서울과 경기도 광주에 도읍해 있었으므로, 서계라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남양 지방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백제 서계의 ‘소석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양조의 석산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3세기경의 마한에는 소석산을 중심으로 소석삭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달리 소석삭국을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에, 대석삭국을 여기와 이웃한 강화도에 비정하기도 한다.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 맹주국과 결속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토착적인 세력 기반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개별적인 성장을 지속하다가 백제에 복속되었다. →마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