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연림 ()

고대사
인물
발해의 부흥국인 흥료국의 제1대 왕.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주요 관직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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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발해의 부흥국인 흥료국의 제1대 왕.
개설

요나라에서 동경사리군(東京舍利軍)의 상온(詳穩 : 장군)으로 있다가 1029년 8월 3일 동경(東京 : 지금의 遼陽)에서 요나라에 저항하여 흥료국을 세우고 연호를 천경(天慶) 또는 천흥(天興)이라 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원래 동경 지방에는 소금과 술을 전매하지 않았고 시장의 세금도 적었는데 이곳에 호부사(戶部使)로 와 있던 풍연휴(馮延休).한소훈(韓紹勳)이 소금과 술에 대해 전매제를 실시하고, 시장의 세금도 무겁게 징수하였다. 또, 그 해 연(燕 : 현재의 北京) 지역에 큰 기근이 크게 든 것을 기화로 호부부사(戶部副使)왕가(王嘉)는 조정에 건의해 요동 지방에서 배를 만들어 이곳의 곡식을 연 지역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 때 뱃길이 험하여 배와 사람의 손실이 컸으므로 사람들이 이의 시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기회를 틈타 대연림은 군사를 일으켜 소효선(蕭孝先)과 부인 남양공주(南陽公主)를 가두고, 한소훈·왕가·소파득(蕭頗得)을 죽인 뒤 요나라에 저항해 나라를 세웠다. 이 때 동경부유수(副留守)왕도평(王道平), 황룡부(黃龍府 : 발해의 부여부) 황편(黃翩), 발해태보(渤海太保)하행미(夏行美)가 호응을 하지 않아 동쪽 길이 막히자, 군사를 나누어 서쪽 길로 심주(瀋州 : 현재의 瀋陽)를 공격하였으나 상대의 속임수에 빠져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 무렵에 남여직(南女直 : 요동반도쪽의 여진)·북여직(北女直 : 松花江쪽의 여진)이 호응하였고, 고려도 관망하고 있었다. 9월 대부승(大府丞)고길덕(高吉德)을 고려에 보내어 건국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는 최사위(崔士威)·서눌(徐訥)·김맹(金猛)이 신중론을 폈지만, 곽원(郭元)이 지원을 고집하여 요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사(太師) 대연정(大延定)이 여진군사를 이끌고 요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요의 토벌군이 속속 도착하여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10월 요나라 도통(都統)소효목(蕭孝穆)은 군사를 독려해 흥료국을 공격하였고, 12월 대연정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지원을 요청했으나 고려는 응하지 않았다. 1030년 정월 다시 고길덕을 고려에 파견해 지원을 요청하였고, 3월 요나라는 장위(長圍)를 쌓아 장기전에 대비하였으며, 8월 비장 양상세(楊祥世)가 몰래 요나라에 항복하고 밤에 남문을 열어 요나라의 군사를 맞이하였다. 이 때 대연림이 사로잡힘으로써 결국 흥료국은 1년 만에 멸망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요사(遼史)』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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