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화현에서 남쪽으로 약 5㎞ 떨어진 육정산(일명 牛頂山)은 높이 603m로 6개의 작은 산봉우리가 연결되면서 동서로 뻗어 있다.
이 중 제일 높은 봉우리의 기슭이 남쪽으로 뻗어내리면서 2개의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그 중 서쪽 골짜기는 좁고 깊으며 지세가 조금 높고, 동쪽 골짜기는 앞이 트여 凹형을 하고 있다.
고분들은 바로 이 두 골짜기에 분포되어 있다. 편의상 서쪽의 것을 제1고분군, 동쪽의 것을 제2고분군이라 부른다.
제1고분군에는 30여 기의 고분이 있다. 이들은 다시 전·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앞부분은 규모가 크고 산골짜기 가운데에 집중 분포되어 있으며, 뒷부분은 대부분 규모가 작고 산골짜기 뒤쪽에서 산허리에 이르기까지 흩어져 있다.
이 지역에 대해서는 1949년 8월에서 10월 사이에 돈화 계동중학(啓東中學)과 연변대학(延邊大學) 역사과가 9기를 정리한 바 있다.
이어서 1959년 8월에 길림성박물관이 주관하고 길림사범대학(吉林師範大學) 역사계와 현(縣)의 문교과(文敎科)가 협조해 2기를 발굴함과 동시에 1949년에 발굴한 9기 중 6기를 재조사하였다.
그 뒤 1963년 10월과 1964년 5월에서 6월까지의 두 차례에 걸쳐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에 의해 다시 5기가 발굴되어 모두 17기에 이르고 있다.
제2고분군에는 50여 기가 비교적 밀집되어 있다. 1963년 10월과 1964년 5월에서 6월까지의 두 차례에 걸쳐 15기의 고분이 발굴되었다. 육정산고분군은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선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 고분군의 성격이 명확하게 드러나게 된 것은 1949년에 정리한 9기의 고분 중 하나에서 제3대 문왕대흠무(大欽茂)의 제2녀인 정혜공주(貞惠公主)의 묘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고분은 제1고분군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대형석실봉토분(大型石室封土墳)으로 현실(玄室)·연도(羨道)·묘도(墓道)로 구성되어 있다. 현실의 천장은 말각조정(抹角藻井)으로 되어 있다.
비문 내용 중에는 “정혜공주가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 : 文王의 尊號)의 제2녀로, 출가한 후 남편이 먼저 죽고, 정혜공주도 보력 4년(777) 4월 14일에 사망해 이 때의 나이 40이며, 시호(諡號)를 정혜공주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보력 7년(780) 11월 24일에 진릉(珍陵 : 武王의 陵)의 서원(西原)에 배장하였다.”라는 내용도 찾아볼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이 밝혀진 것을 계기로 육정산 고분군이 발해 초기 왕실과 귀족의 무덤이라는 사실과 이곳에서 가까이에 있는 오동성지(敖東城址)가 첫 도읍지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발해의 건국사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