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학 ()

근대사
개념
동양지역의 사회와 문화의 역사적 변천을 연구하는 학문.
정의
동양지역의 사회와 문화의 역사적 변천을 연구하는 학문.
개념

한국뿐 아니라 한자문화권에 사용되는 ‘동양(東洋)’이라는 용어는 그 형성 변천되는 과정이 다양한 계보를 갖고 시기적으로 포괄하는 범주와 뉘앙스가 다기하기 때문에, 그 지역범주를 포함한 용어의 함의는 매우 복합적이고 다중적이다.

한자어로서 ‘東洋’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중국의 송원(宋元)시대이다. 당시 남중국해를 통하여 인도양연안의 국가들과 교역하는 무역상(貿易商)들에 의해 쓰여졌는데, 17세기 편찬된 장섭(張燮)의 ≪동서양고 東西洋考≫에 나타난 바와 같이, 대체로 광주(廣州)를 기준으로 동쪽 방향의 지역 즉 대만(臺灣) 필리핀 자바섬 등의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남지나해의 무역이 붕괴되고 서구 유럽세력이 주요한 교역 대상으로 떠오르면서, 이들을 가리키는 ‘서양(西洋)’ 혹은 ‘대서양(大西洋)이라는 관념에 대비되어, ‘동양(東洋)’은 일본(日本)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한정되었다.

현대 중국에서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일본만을 가리키는 의미로서 동양(東洋)이라는 관념은 거의 사라졌을 뿐 아니라 어떤 특정의 지역세계나 문화권을 의미하는 의미로서도 동양(東洋)이라는 용어도 별로 사용되지도 않는 것은 과거의 개념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런 전통과는 별도로 19세기 말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문명과 제국주의라는 양면의 모습을 띈 서구의 실체가 강하게 의식되어 ‘서양(西洋)’으로 규정되면서, 이에 대응되는 개념으로서 ‘동양(東洋)’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엄밀하게 독자적인 개념규정에 의해서 형성된 용어가 아니고 ‘비서양(非西洋)’이라는 관념에 입각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에, 광의로는 동아시아이외에 서아시아와 인도지역을 포함하는 아시아대륙 전체를 의미하였지만 문화적인 차원에서는 유교문화권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를 의미하는 협의의 개념이 혼효되어 있었다.

당시 인류역사를 서구문화권 중심으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권이 공존하는 세계사로 파악하려는 의식이 강하였지만, 그 내면에는 당시 서양화(西洋化)에 대한 강한 욕구와 서양세력에 대한 거부감이라는 상반되는 감정이 미묘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즉 ‘문명적이고 선진적인’인 서양에 대비되어 ‘미개하고 낙후된 지역’으로서 동양이라는 가치판단과 서구세력과 병립할 수 있는 지역문화권으로서 통합의 실체라는 의미로 동양을 확인하는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당시 ‘동양’이외에 ‘동아(東亞)’, ‘아세아(亞細亞)’, ‘아주(亞洲)’ 등 유사한 개념을 갖는 용어들이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대체로 가치관념이 배제되고 지리적 범주도 명확히 한정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이러한 용어들은 주로 지역적 국제질서와 통합을 강조하는 경우에 사용되는데, 문화적 측면에서 비서양(非西洋)이 강조된 동양보다 보다 명확한 개념이었다.

그럼에도 그 범주가 애매한 동양(東洋)이 계속 사용된 것은 서구와는 문화적 요소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서구의 Orient라는 개념과 대응되기 쉬워 그 번역어로 이용되었던 것도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오리엔트(Orient)는 그리스 로마시대 Occident와 대비되어 페르시아 인도지역을 가리키는 용어였는데, 이후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가 알려지면서 이 역시 그 범주에 포함되었다.

서구인에게 Orient는 고대에는 ‘문명의 원천’ ‘경외로운 지역’ 등의 두려우면서도 긍정적인 가치관념이 투영되어 있었는데, 절대왕정시기를 전후하여 ‘전제주의’ ‘역사발전의 정체’ 등 부정적 가치관념의 개입으로 반전되었다.

그 문화적 기반이 다른 지역을 포괄하면서도 사회성격을 동일하게 파악함으로써 극히 서구중심의 관념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개념상의 모호성보다는 서양과 단순하게 대비된다는 편리성과 서구적 학문체계를 동경하는 지성계의 풍토가 동양이라는 관념을 지속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2차 대전 이후 서구에 대해 배타적인 입장을 강조하였던 중국과 북한에서 의식적으로 동양(東洋)이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사실은 이 용어가 갖는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양(東洋)이라는 관념이 본격적으로 학문 특히 역사학에서 채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에서였다.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중등학교 교과과목에 과거 ‘지나사(支那史)’가 ‘동양사(東洋史)’로 개편되고, 러일전쟁(露日戰爭)을 계기로 동경대학(東京大學)에 지나사학과(支那史學科)가 동양사학과(東洋史學科)로 확대되고 주요 대학에 동양사 교과목이 개설되면서부터였다.

주로 전통적인 한학(漢學)의 기반과 독일에서 수용된 실증주의적 역사학의 방법론에 입각하여 지역문화권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분야로 동양사학이라는 개념이 정착되는데, 물론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가 중심이었지만 인도지역과 서아시아를 배제하지는 않아 그 범주는 여전히 애매하였다.

동아시아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조선시대까지 중국 일본 등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지역이 그 자체로 세계이기 때문에 지역문화권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인간의 역사가 성인의 경(經)에 종속되는 성리학적 사유방식 때문에 역사학 자체가 독립적인 학문체계로서 의미를 갖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모범과 가치판단의 수단으로서 규범화된 중국역사에 대한 지식은 풍부하였지만, 다른 민족과 문화에 대한 분석의 대상으로서 중국이나 일본에 대한 역사학은 존립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영조(英祖)정조(正祖)시대 활발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분위기가 성장하여 민족(民族)에 대한 자각이 확대되면서, 민족의 역사를 의식하고 정리하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중국민족과 그 역사도 상대화되면서, 정조(正祖)의 ≪송사전 宋史筌≫과 같이 중국의 사서(史書)에 의존하지 않고 중국역사에 대해 주체적으로 분석하고 서술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특히 ‘북학(北學)’에서는 과거 중화주의(中華主義)적 관념에서 벗어나 상대화된 중국관을 형성할 수 있는 인식의 근거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은 견고한 성리학적 역사인식의 벽과 조선말의 정치 사회적 혼란의 와중에서 구체적인 성과는 미약하였지만, 새로운 세계인식과 역사관이 형성될 수 있는 학문적 역량과 인식기반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시대를 맞아 독자적인 학문 여건이 마련되지 않을 뿐 아니라 전통적인 학문 역량과 체제도 붕괴되면서도 새로운 학문의 틀은 마련하지 못하였고, 그나마 최소한의 역량도 식민지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민족사 추구에 매달리면서 세계사적 관점에서 지역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추구하는 활동은 완전히 꺾일 수밖에 없었다.

간헐적으로 만주(滿洲)몽고(蒙古), 그리고 고대중국(古代中國)에 관한 논고가 발표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계몽적인 지식 차원에 그쳐 본격적인 학문활동으로 보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민족사의 안목을 확대하려는 의지가 강하여 세계사 혹은 외국사의 차원에서 추구되는 본격적인 동양사학과는 차이가 많았다.

일본의 학문체제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기도 하였지만, 동아시아 지역세계의 강조가 일본 제국주의에 이용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강한 거부감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동양사학 연구의 시작과 발전

우리 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역사학적 방법에 의한 동양사학 연구의 시작은 해방후 1948년에 출간된 김상기(金庠基)의 ≪동방문화교류사론고 東方文化交流史論攷≫(을유문화사)와 ≪중국고대사강요 中國古代史綱要≫(정음사)와 1949년 ≪역사학연구 歷史學硏究≫ 1집에 게재된 김일출(金日出)의 <춘추회맹논고 春秋會盟論考>고병익(高柄翊)의 <이슬람교도와 원대사회>, 전해종(全海宗)의 <당대균전고 唐代均田考>라는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동시에 상당수준의 연구가 제출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시대 비록 활발한 연구활동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동양사학에 대한 강렬한 지적욕구가 내연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들 연구는 모두 서울대학교 사학과 동양사연구실(東洋史硏究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척박한 환경에서 중국의 고대 사서를 비롯한 최소한의 연구자료를 갖춘 것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연구실은 해방 후 사학과에 국사연구실(國史硏究室) 서양사연구실(西洋史硏究室)과 함께 설치되었는데, 우리 나라에서 동양사학(東洋史學)이라는 개념이 정착되는 근거가 되었다.

김상기는 전통적인 우리의 한학(漢學)을 기반으로 역사학에 접근하였기 때문에, 민족사의 외연으로 중국사를 파악한다는 입장이 강하였다.

문화권의 원류로서 중국고대사에 관심을 가지며 한중교류사(韓中交流史)를 추구하면서 고려시대(高麗時代)에 관한 집중적인 연구를 추진하였던 것은 그의 역사학 입장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전통은 이후 상당기간 계속되었다. 고병익도 독일유학을 통하여 서구적인 방법론을 습득하고 중국의 원(元)과 당대(唐代)에 관한 주목할 연구성과를 발표하였지만 결국 고려와 몽고, 조선말의 대외관계 등 한국의 대외관계사로 귀환하였고, 전해종은 일찍부터 한중관계사(韓中關係史)에 천착하였다.

조금 늦게 활동을 시작한 민영규(閔泳珪)·이용범(李龍範)·윤남한(尹南漢)·황원구(黃元九) 등도 민족사 연구의 확장이라는 차원에서 중국사를 추구하는 전통을 계승하여 우리 나라 동양사학 연구의 한 특징을 형성하였다.

이는 당시 중국과의 교류가 단절되어 자료 구득이 어렵고 냉전체제(冷戰體制)로 중국자체에 대한 관심을 갖거나 연구의욕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취약하였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민족사의 확립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에 민족이 포함된 지역문화권의 역사연구가 담당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라는 자각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 후 대학이 속속 들어서고 사학과(史學科) 체제 또한 정비되고 중고교의 세계사 과목도 확정되면서, 역사 철학 등 인문학에서 학문 분류의 방편으로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이 정착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 범주의 애매성, 학문적 엄정성을 상실할 수 있는 가치관념의 투영 등의 이유 때문에, 동양 대신 다른 용어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김상기(金庠基)가 ‘동방(東方)’, 고병익(高柄翊)이 ‘동아(東亞)’라는 용어를 굳이 사용하였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방(東方)은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에서 많이 사용되어 꺼리게 되고, 동아(東亞)는 일제(日帝)를 회상케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도나 서남아시아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게 정착되지 않아 굳이 오리엔트(Orient)에 대응된다는 편리성을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어떻든 대학을 비롯한 각급 학교의 교과체제로 정착되면서 동양사학에 대한 수요는 급증하였다. 그러나 6·25를 겪으면서 건국 초기에 비해 연구여건은 크게 나아지지 못하였다. 사회적 수요에 부응하여 50년대 조좌호(曺佐鎬)의 ≪동양사대관 東洋史大觀≫(1955), 채희순(蔡羲順)의 ≪동양사개론 東洋史槪論≫ 등의 출간되기도 하였지만, 독자적인 연구에 근거하기보다는 외국의 연구성과를 차용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연세대학교에 동방학연구소(東方學硏究所), 서울대학교에 동아문화연구소, 고려대학교에 아시아문제연구소와 같은 동양사 관련 연구기관들이 설립되기도 하였지만 실제 동양사학 연구에 크게 기여하지는 못하였다.

연구기관들이 한국학 연구에 치중하거나 이데올로기와 관계된 현실문제에 집착하여 동양사학의 본연의 연구활동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나라 동양사학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사 연구가 민족사의 연구라는 당면의 문제에 휩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공산정권이 들어선 중국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편견, 서구중심적인 가치관념의 지속 등이 동양사학 연구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대학에서의 교양필수로 정착된 「문화사」는 대부분 서양사로 이해되었고, 중고교의 세계사 교과에서는 서양이라는 관념에 근거하여 유럽의 역사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던 사실은 당시의 분위기를 잘 말해 준다.

이러한 악조건이지만 초창기 학자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1965년 11월 동양사학회가 창립됨으로써 동양사학 연구가 본격적 궤도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해종(全海宗)고병익(高柄翊)이용범(李龍範)윤남한(尹南漢)황원구(黃元九)민두기(閔斗基) 등 31명의 학자가 발기인으로 창립한 동양사학회는 곧바로 월례발표회를 개최하여 연구의 질적 수준을 확대하고, ≪동양사학연구 東洋史學硏究≫라는 학보를 발간하여 연구분위기를 고양하였으며, ≪동양사료초집 東洋史料抄集≫이라는 사료집을 발간하여 대학 사학과의 교재로 공급하여 연구자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연구방법과 접근방식에도 반영되어 이전처럼 단순한 민족사의 외연으로서가 아니라 외국사 혹은 세계사라는 시각에서 접근하는 연구가 본격적으로 제출되었다. 이는 단순한 연구방법의 문제를 떠나서 새로운 학문적 욕구를 확대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수준 높은 연구가 제출되고 외국과의 학술교류도 활발해져, 전해종·고병익·이용범·황원구·민두기·민성기·김엽 등의 연구가 대만(臺灣)일본(日本)미국(美國) 등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특히 민두기의 ≪중국근대사연구≫(1973, 一潮閣)는 중국사 연구의 전저(專著)로서는 우리 나라 최초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탁월한 수준이 인정되어 미국에서 ≪National Polity and Local Power; The Transformation of Late Imperial China≫(Harvard East Asian Council and Harvard Yenching Institute, 1989)로 번역 출간되기도 하였다. 이후 활발해진 많은 학자들의 연구서의 출간은 그의 활동에 자극 받은 바가 크다.

1970년대까지 동양사 연구는 대체로 중국사에 집중되어 있었다. 심지어 일본사(日本史)조차도 중국사 연구자인 민두기가 정리한 ≪일본사의 역사≫가 장기간 가장 대표적인 참고서로 이용되고 있었다.

1970년 동양사학회가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주최한 “동양사연구의 반성과 과제”라는 학술대회에서 공간적 시간적으로 연구시야를 확대하고 연구의 협동과 비교연구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80년대에 들어 월남사의 유인선(劉仁善), 일본사의 김용덕(金容德)·박영재(朴英宰) 중앙아시아사의 김호동(金浩東) 등이 해외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이 분야의 1세대로서 활동을 시작함으로써, 동양사학의 연구시야는 한층 넓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90년대로 계속 이어져 서아시아사 동남아시아사 인도사 등지로까지 확대되어 동양사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연구자를 갖추고 연구성과를 배출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75년부터 부분적으로 중국의 문호가 열리기 시작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중국의 정치상황과 그곳의 연구성과는 중국사 특히 중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크게 고양시켰다. 연구지망생이 크게 늘어 이때 배출된 연구자들은 이후 연구자층을 두텁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80년대 이후 중국의 개방이 확대되고 새로이 발굴된 자료들이 소개되면서 우리 나라에서의 중국사 연구는 그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성규(李成珪)를 중심으로 고고발굴에 의한 화상과 문헌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연구를 통하여 중국이나 일본의 연구를 뛰어 넘는 새로운 고대사상(古代史像)을 구축하기도 하였고, 오금성(吳金成)조영록(曺永祿)박원호(朴元滈) 등에 의해서 현지 문헌자료를 구체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구성과는 1990년 중국 북경대학과 공동으로 개최한 동양사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되고 이어 중국에서 출간되어 한국의 연구 수준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 중국에의 여행이 자유로워지면서 중국사연구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동안 굶주렸던 역사현장에 대한 갈증이 일거에 해소되었다.

그것은 역사이해를 보다 생동감있게 표현하려는 욕구를 자극하였는데, 박한제(朴漢濟)·이개석(李介石) 등에 의해 이루어진 현장에서의 치밀한 역사학적 회상은 엄숙하고 딱딱한 동양사학의 이미지를 불식시켜 동양사에 대한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관심을 제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90년대 이후 동양사학연구에 소개된 동양사관련 연구와 출판요목의 내용이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잘 말해준다. 1999년 5월에 출간된 ≪한국동양사연구자논저총목록 韓國東洋史硏究者論著總目錄≫(경인문화사)에는 6500여건의 논저와 논문이 확인되었다.

동양사학의 연구 특징과 문제점

이처럼 50년의 전통을 갖게 되는 한국의 동양사학은 그동안의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역사학보 歷史學報≫ 매년 12월호에 정리되고 있다. 현재까지 문제되고 논의되는 내용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에 대한 그동안 전체적인 연구 특징과 문제점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동양사학회 추계발표회의 분과편성이나 분과학회의 구성에서 보듯 연구분야는 대체로 중국고대사, 위진남북조수당사, 송요금원사, 명청사, 중국근현대사, 월남 및 동남아시아사,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연구방법론의 문제라기 보다 연구자의 인력상황과 연과성과 배출량이 크게 반영된 것으로, 여전히 극히 중국 중심의 연구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학문적 욕구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동양사학이라는 학문분류법이 갖는 문제점일 수도 있다. 즉 동양(東洋)이라는 애매한 개념에 입각한 역사학의 분류법은 결국 인도나 서아시아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문화적 특징 사료형태 사회구성 등 결코 동일하게 파악할 수 없는 세 문화권을 서구와 대비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일한 범주에 포함시켰던 것은 초창기에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이 지역에 대한 학문적 수요와 연구열을 감쇄시키는 요인이 되어, 서아시아 인도는 물론 동아시아사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장애로 작용하였다. 학문 용어 자체가 이 시대의 특수한 산물로서, 결국 그 자체의 연구에 의해 검토 받고 정리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둘째 동아시아사의 문제만으로 국한할 경우 초창기 동양사를 민족사의 외연으로서 접근하였던 사실에서 보듯, 동아시아사학 특히 중국사를 우리 문화권의 역사로 접근하느냐 아니면 외국사나 세계사로서만 접근하느냐가 초창기이래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가치관념과 문화공동체로서 동아시아문제가 특히 한국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것은 결국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이었다. 이는 결국 해결이 있을 수 없는 한국의 중국사나 동아시아사 연구자에게 영원한 화두로 남게 될 수밖에 없는 문제일 지도 모른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동양사학 자체가 외국이라는 차원에서의 관심보다는 극히 민족사적 관점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외국에 대한 단순한 지식이나 이해의 확대가 아니라 우리의 지적 인식의 근거라는 측면이 초창기부터 강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체의 논리와 방법론이 유난히 강조되어, 연구방법이나 연구자의 배출 그리고 육성과정에서 국내의 토대가 중시되었다. 다른 학문 분야에 비해 외국의 직접적인 영향을 적게 받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렇지만 전통과 단절된 교육과 연구의 체제 때문에, 독자적인 연구 방법이나 인식기반의 전통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실적으로 외국 특히 일본의 간접적인 영향이 상당히 크게 나타나게 된 것은 사실이다.

이는 우리사회의 문화적 정신적 주체성과 관련된 총체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동양사학이 갖는 특성상 보다 심각한 문제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서 조선시대와 일제시대의 학인(學人)들의 중국이해와 중국관(中國觀)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고 연구를 추진하였던 것은 우리의 동양사학 특히 중국사학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주목된다.

넷째로 앞의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될 수 있는 문제로서, 현재 한국의 개별적인 연구수준은 국제적인 수준에 뒤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외국에서 발행된 연구성과에는 극히 일부분 외에 국내의 연구성과가 반영되거나 소개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언어문제가 가장 큰 요인으로서, 한국의 전반적인 연구가 충분히 축적되지 못하여 외국인에게 한국어가 그렇게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국내 중심의 연구분위기가 초래한 결과이기도 하다. 어떻든 현재 외국사의 연구인 동양사학은 그 자체가 국제적인 성격을 띌 수밖에 없는 것으로, 그것이 연구결과의 중요한 가치이고 또 연구의욕을 확대시키는 근거이기도 하다. 국제교류와 국제학계에서의 공헌을 확대하는 것이 국내적 동기와 의미 외에 앞으로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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