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72인의 성명이 모두 전하지는 않고, 임선미(林先味)·조의생(曺義生)·성사제(成思齊)·박문수(朴門壽)·민안부(閔安富)·김충한(金沖漢)·이의(李倚) 등의 성명만 전한다. 그 밖에 맹(孟)씨라는 성만 전하는 자가 있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이다.
이들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구전(口傳)이 있는데 그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지명은 조선이 건국되자 태학생 임선미 등 72인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서 마을의 동·서쪽에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고서 문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편, 태조는 고려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경덕궁(敬德宮)에서 친히 과장(科場)을 열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도 응시하지 않고 경덕궁 앞의 고개를 넘어가 버렸다. 그래서 그 고개를 부조현(不朝峴)이라 하였다. 그리고 부조현 북쪽에 관을 걸어놓고 넘어갔다 하여 이를 괘관현(掛冠峴)이라 불렀다고 한다.
1740년(영조 16) 영조가 개성을 행차할 때 부조현의 이러한 유래를 듣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 뒤 이 고사가 임선미·조의생 자손의 가승(家乘)을 통하여 정조에게 알려져 1783년(정조 7)에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추모하였다.
다른 한 속전(俗傳)에 따르면, 개성 부근 보봉산(寶鳳山) 북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도 두문동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조선이 건국된 후 고려 유장(遺將) 48인이 들어와서 몸을 씻고서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한 골짜기라고 한다. 이들의 성명 역시 전하지 않는다. 다만 세신정(洗身井)·회맹대(會盟臺)라는 지명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