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백목을 취급하였기 때문에 백목전이라고 하였고, 때로는 목면(木綿)과 은자(銀子)를 겸하여 매매하였기 때문에 은목전(銀木廛)이라고도 하였다.
면포전의 국역부담은 9분이나 되는 큰 부담을 졌던 시전이었다. 조선시대에 의료(衣料) 중 면포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을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중기 이후에 면화재배가 확대되고 있으나 아직도 국민의 태반을 이루는 하층 근로대중의 생필품에 이르지 못하고 지배계급 및 그 아류들의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면포는 근로대중의 생필품화되기까지 그 시장성이 아주 밝은 업종이었다. 면화재배에 적합한 지역은 역시 삼남지방으로, 그 중에서도 나주지방의 백목길쌈이 유명하였고, 그 생산물은 한양의 경시 시전에 집화(集貨)되어 거래되었다.
조선 말기에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의 한성부 시전조에는 면포전 대신 백목전이라고 표기되었고, 팔의전(八矣廛)의 하나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