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진도 출신. 1919년 12월 고향에서 서당에 다니던 중 동료생 정경옥(鄭景玉)·박석현(朴錫鉉)·김인수(金仁洙) 등과 함께 항일결사 보향단(補鄕團)을 조직하고 만세시위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그 뒤 1922년에 진도기독교청년회의 총무로 활약하였으며, 1924년 7월에는 진도소작인회(珍島小作人會)를 조직, 총무로 선임되어 소작쟁의를 지도하였다. 1926년 12월에는 진도신흥청년회(珍島新興靑年會)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27년에 붙잡혀 금고 6월형을 받았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28년 9월에 대판(大阪)에서 같은 고향 출신인 박봉석(朴鳳石) 등 4명과 함께 조선적화당(朝鮮赤化黨)을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펴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9년 10월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귀향하여 1933년 1월에 조규선(曺圭先) 등과 사회과학 연구를 목적한 자각회(自覺會)를 조직, 조사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 12월에 중앙일보사(中央日報社) 진도지국장을 역임하다가 앞서 조직하였던 자각회원들의 주도로 1934년에 진도적색농민조합(珍島赤色農民組合)을 결성하여 교양부원과 진도면을 담당하여 항일투쟁을 펴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1936년 1월에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