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태안(泰安). 자는 춘경(春卿), 호는 서계(西溪). 아버지는 황해도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 박창윤(朴昌潤), 어머니는 진주하씨(晉州河氏) 하달영(河達永)의 딸이다. 여덟 살 때부터 하정(河瀞)의 문하에서 수학(受學)하였다.
평생 문달(聞達: 세상에 널리 이름이 알려짐)을 구하지 않고, 일찍부터 학문에만 전념하여 1696년(숙종 22)부터 진주(晉州) 남내동(南柰洞) 지계(芝溪) 서쪽에 서계서실(西溪書室)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를 업으로 삼았다.
때때로 권두경(權斗經)·하덕망(河德望) 등 여러 석유(碩儒)들과 교유하여 더욱 강마(講磨)에 힘쓰는 한편, 대각서원(大覺書院), 임천서원(臨川書院) 등의 강회(講會)에도 나아가 경의(經義)를 강론(講論)하기도 하였다.
1708년(숙종 34)에 이재(李裁)와 제유(諸儒)들이 너무 이기론(理氣論)에 천착(穿鑿)함이 온당치 못하다고 논변하였다. 또 1731년(영조 7)에는 근기(近畿) 일원에 분분하던 ‘유석일본지론(儒釋一本之論)’에 대해 성호(星湖) 이익(李瀷)과 유불(儒佛)이 같은 근본이 아님을 누누히 논석(論釋)하였다.
만년에 이르러는 원근(遠近)에 믿고 따르는 이가 날로 많아지자, 이에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증손(增損)하고 퇴계(退溪)의 향약(鄕約)까지 참고해 새로이 「동약(洞約)」을 만들어 인근에 실시케 하면서, 편술(編述)에 진력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박태무는 『역경(易經)』에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는 있어도 ‘이기지목(理氣之目)’과 ‘이기지설(理氣之說)’은 본시 말하지 않았는데도 후유(後儒)들이 ‘이기지학(理氣之學)’을 너무 천착(穿鑿)하니 이를 삼가고, 오로지 예교(禮敎)를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 것만이 치민(治民)의 대도라고 주장하였다.
저술로는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진양향현록(晉陽鄕賢錄)』·『유주록(遺珠錄)』·『박씨세덕록(朴氏世德錄)』·『소학촬요(小學撮要)』·『환성록(喚醒錄)』 그리고 『서계집(西溪集)』 8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