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포로 석방 ( )

국방
사건
1953년 6월 18~19일 당시 부산, 광주, 논산 등 전국 8개 지역의 포로수용소에서 이승만 정권의 주도하에 반공포로 2만 7천여 명을 탈출시킨 사건.
정의
1953년 6월 18~19일 당시 부산, 광주, 논산 등 전국 8개 지역의 포로수용소에서 이승만 정권의 주도하에 반공포로 2만 7천여 명을 탈출시킨 사건.
역사적 배경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서로 타협할 수 없는 몇 가지 휴전조건을 가지고 대립하고 있었을 때까지 한국정부는 유엔군과 보조를 같이 하였으나, 휴전협상에 진전이 있을 때에는 국민대회가 개최되고 군중들의 시위가 있었다.

휴전협정이 성립될 가능성이 짙어진 1953년 4월 이후부터는 한국의 휴전반대가 범국민운동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휴전회담 재개의 기운이 무르익어 갈 무렵, 신태영 국방부장관은 성명을 통해 평화수립 전제조건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① 북괴 반역군의 무장을 즉시 해제시킬 것, ② 한국 영토로부터 중공군은 즉시 철수할 것, ③ 국제연합 관리 하에 북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할 것, ④ 외국 침략에 대하여 국제적 보증을 확보할 것, ⑤ 포로송환을 다루는 국제회의에서 한국대표를 참가시킬 것 등이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 국회도 미국에 대해 한국의 완전통일을 보증하지 않는 어떠한 정책도 시행하지 말도록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병상포로 교환을 위한 논의가 활발해짐에 따라 한국 측의 휴전반대운동도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현 위치에서의 휴전보다는 군사적 승리와 압록강까지의 진격을 부르짖었다. 서울에서는 군중대회가 개최되어 5만여 명의 군중이 참가하였으며, 연사들은 한결같이 휴전을 비난하였다.

그러나 한국민의 열망에는 아랑곳없이 휴전회담 대표들은 1953년 4월 10일 휴전을 요구하는 국제정세에 밀려 제네바협약 제109조에 따라 병약 및 부상포로들의 교환에 합의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정부와 국민은 이날부터 대대적인 휴전반대운동을 다시 전개하였다. 4월 21일 국회는 북진통일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3일 후에 대통령은 중공군이 압록강 남쪽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위임한 것을 철회하여 필요하다면 단독으로라도 싸울 것이라고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에게 통보하였다.

4월 27일 유엔군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해 서울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유엔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회수하려 하지 않을 것임을 감지하였다. 이 자리에서 논의된 중요한 문제는 유엔군과 중공군의 동시 철군이었다.

미국은 휴전을 서둘렀다. 이리하여 비밀회담을 열어 병상포로 교환 이후 그동안 타협에 이르지 못했던 포로문제에 대해 협의하였다. 본국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 관리위원회의 관리하에 두고 이들 포로를 설득하며, 여기서도 송환을 거부하면 정치회담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는 유엔 총회의 결정에 따른다는 안을 제시하였다. 이 소식은 한국정부와 국민을 경악케 하였으며 심한 반발마저 초래하였다. 우선 휴전회담 한국 측 대표는 회담 참석을 거부했다.

한국정부는 통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단독으로라도 계속 싸울 것임을 주장하였으나 휴전으로 한국전쟁을 종결시키려는 미국의 확고한 의도를 변경시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문제에 관한 한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국민들은 휴전반대에 적극적이었다.

유엔군 측이 한국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5월 25일의 제안을 기초로 하여 협상을 지속시켜 나가자, 이승만 대통령은 6월 6일 휴전에 대한 대안을 유엔군과 공산군 측이 동시에 철군하고, 이 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제안에 대해 미국은 즉각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이 곧 성립되리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모종의 압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내용

1953년 6월 6일 한국대통령은 반공포로의 석방을 추진하였다. 그는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경무대로 불러 반공포로의 석방계획을 수립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남한 전역에 임시 비상경계령을 발령하고, 모든 미국 주재 한국 관리들을 귀국조치시킴과 동시에 한국 측 휴전회담 대표를 소환하여 휴전반대 입장을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6월 8일 한국 국민의 열망에는 아랑곳없이 포로송환협정은 조인되었다. 포로송환협정의 조인은 사실상의 휴전성립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전례 없는 반미징후가 한국전역에서 일기 시작하고, 휴전반대시위가 그 빈도나 규모면에서 증가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의 석방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심의 이면에는 반공포로를 송환시킬 수 없다는 이념적인 측면과 외교적 주도권의 장악 및 한국국민의 반공통일에 대한 의지, 그리고 휴전협상에 전쟁 당사국인 한국의 주장이 전혀 참작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이렇듯 반공포로의 석방은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민의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었으나 공산군 측의 비난과 유엔 참전국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편 유엔군사령관은 1953년 5월 25일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들을 석방할지도 모르며 그러한 움직임으로 저지할 수 있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고 상부에 경고한 바 있었다. 한국 내에는 약 3만 5천명에 이르는 반공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각 수용소장은 소수의 행정참모와 기술참모를 거느린 반면, 경비 병력의 대다수는 한국군이었다.

6월 18일부터 이틀간 이승만 대통령이 추진하여 온 반공포로의 석방이 단행되었다. 반공포로들은 한국군 경비병의 묵인과 협조 하에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였다. 반공포로들은 거제리 수용소, 가야리 수용소, 광주 수용소 등 총 8개 수용소 총 인원 35,698명 가운데 27,388명이 탈출하였다. 반면 56명의 포로들이 탈출과정 중에 사망하기도 하였다.

국민들은 탈출 포로들을 따듯하게 대하여 음식과 숙소를 제공해 주었으며 심지어 영웅으로 취급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행정기관과 국민들이 포로들에게 옷을 주고 민가에 숨겨 주어 미군 당국의 재수용 노력도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반공포로가 석방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공산군 측은 물론 세계여론의 관심이 한국에 집중되었다. 유엔군 측 수석대표는 공산군 측 수석대표에게 반공포로의 수용소 탈출 사실을 통지하였다. 공산군 측은 대단한 분노를 표시하면서 모든 포로들을 재수용하라고 강력히 요청하였다.

탈출한 포로들은 대부분 지방주민들과 섞여 버렸고 더구나 한국정부 당국이 그들을 비호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재수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반공포로들의 탈출 소식을 확인한 후 이승만 대통령은 “제네바협약과 인권정신에 의하여 반공 한인포로는 벌써 다 석방되었어야 할 것인데…… 국제 관계로 인해 불공평하게 그 사람들을 너무 오래 구속했었다. (중략) 그러므로 내가 책임을 지고 반공 한인포로를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반공포로 석방에 관한 공산군 측의 반응은 다음날인 6월 19일 아침에야 나타났다. 그들은 통역관 회의와 비무장지대의 세부 작업을 책임진 다른 참모장교회의도 취소하였다. 6월 20일 본회담이 재개되었을 때, 적의 대표는 유엔군 측이 포로 석방을 함에 있어 이승만과 공모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의의

반공포로 석방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일이라도 단독으로 단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해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모든 국군과 군사시설이 유엔군사령관의 지휘 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한국 대통령이 휴전회담을 결렬시키기로 결심만 한다면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어떠한 협정을 체결하더라고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주었다.

참고문헌

『한국전쟁과 포로』(조성훈, 선인, 2010)
『한국전쟁』하(국방군사연구소, 1997)
『한국전쟁휴전사』(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9)
집필자
이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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