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미의 난 ()

고려시대사
사건
1193년(명종 23), 경상북도 청도의 운문사(雲門寺)를 중심으로 김사미가 일으킨 저항.
이칭
이칭
김사미(金沙彌)와 효심(孝心)의 난, 운문(雲門)과 초전(草田)의 난
사건/사회운동
발생 시기
1193년(명종 23)
종결 시기
1194년(명종 24)
발생 장소
경상북도 청도(靑道)
관련 인물
김사미(金沙彌)|효심(孝心)|이지순(李至純)|전존걸(全存傑)
내용 요약

김사미의 난은 1193년(명종 23) 경상북도 청도의 운문사(雲門寺)를 중심으로 김사미가 일으킨 저항이다. 김사미는 ‘사미(沙彌)’라는 이름에서 운문사와 관계된 ‘수원승도(隨院僧徒)’일 가능성도 있다. 이 저항이 초전(草田)의 효심(孝心), 밀성(密城)의 저전촌(楮田村) 등의 저항과 같이 벌어졌던 점에서 경상도 전역에서 저항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최고 집정자 이의민의 지역적 기반이 경주(慶州)였고, 이를 중심으로 한 이의민의 재지 기반 확대가 경상도 일대의 재지 세력과 일반 민의 반감을 불러일으켰음을 보여 준다.

정의
1193년(명종 23), 경상북도 청도의 운문사(雲門寺)를 중심으로 김사미가 일으킨 저항.
발단

1183년(명종 13) 7월 경대승(慶大升)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권력의 공백을 초래하여 파행적인 정치 운영을 부채질하였고, 지방 사회의 폐단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정치 및 사회적 상황에서 무신정권을 안정시키고 지방 사회의 동요를 막기 위해 1188년(명종 18) 여러 ‘개혁(改革)’ 교서(敎書)들을 반포하게 되었다. 이는 이고 · 이의방 정권, 정중부 정권, 경대승 정권으로 이어진 잦은 정변으로 인해 실추된 무신정권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정국 운영의 현안으로써 지방 사회의 동요를 불식시키는 정책적 대응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방 사회의 폐단과 저항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즉 집권 무신 세력들은 기존의 관료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공적 권력의 정당화를 이룩했지만,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사적 지배 기반을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이의민(李義旼) 자신도 정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적 정치 권력의 장악과 더불어 사적 지배 기반의 확보라는 상호 모순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이 1193년(명종 23) 김사미(金沙彌) 저항의 발생 배경이었다.

김사미의 출신 성분은 알 수 없으나, ‘사미(沙彌)’라는 이름에서 청도(靑道) 운문사(雲門寺)와 관계된 ‘ 수원승도(隨院僧徒)’일 가능성이 있다. “ 남적(南賊)이 봉기하니 그 큰 도적인 김사미는 운문(雲門)에 웅거하고, 효심(孝心)은 초전(草田, 지금의 울산광역시)에 웅거하여 망명(亡命)한 무리를 불러 모아 주현(州縣)을 노략질하였다.”라고 하여, 초전의 효심이 동시에 저항을 일으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망명의 무리도 무신 집권기 지방 사회의 폐단으로 인하여 재지 질서로부터 이탈한 농민층과 기타 재지 세력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저항의 구성원은 상당한 정도의 인적 기반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지역적으로는 운문 · 초전과 1194년(명종 24) 4월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가 공격했던 밀성(密城) 저전촌(楮田村) 등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아마도 경상도 전역에서 저항이 전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지역의 저항은 최고 집정자 이의민의 지역적 기반이 경주(慶州)였다는 점에서, 경주를 중심으로 한 이의민의 재지 기반 확대가 경상도 일대의 재지 세력과 일반 민의 반감을 불러일으킨 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경과 및 결과

김사미가 지휘한 저항군은 초전을 근거로 한 효심의 저항군과 정보도 교환하고 작전도 상의해 연합 전선의 태세를 갖춘 일면도 있었던 것 같다. 중앙 정부에서는 대장군 전존걸(全存傑)이 장군 이지순(李至純) · 이공정(李公靖) · 김척후(金陟侯) · 김경부(金慶夫) · 노식(盧植) 등을 인솔하여 현지에 출정하게 하였다. 당시 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이의민이며, 장군 이지순은 그의 아들이었다. 정부의 토벌군은 저항군과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해서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이의민 열전에 의하면, 토벌 작전의 실패는 이지순이 김사미 · 효심 등과 서로 공모해서 작전의 기밀을 누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저항군에게 의복 · 식량 · 신발 · 버선 등 군수 물자를 원조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토벌군 사령관 전존걸은 이지순의 공모 행위를 알고 있었으나, “법에 따라 이지순을 처벌하면 그의 아비가 나를 죽일 것이고, 처벌하지 않으면 적의 세력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라고 하면서 궁지에 몰려 자살하였다. 이의민이 저항 세력과 내통한 것으로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의민은 경주 사람이었고,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의 저항이 발발했을 때 경주에서 의종(毅宗)을 시해하였으며, 경대승 집권기에서는 신변의 위협을 받아 경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은 이의민이 경주에서 상당한 정도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이 시기 그의 권력은 이미 최고 집정자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가 저항 세력과 결탁하려 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이의민은 국왕 명종의 신임으로 최고 직책을 제수받았고, 그 족당(族黨)과 당여(黨與)들도 널리 형성되어 있었다. 이런 가운데 김사미 · 효심 등의 저항은 그의 정권 유지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특히 저항 세력의 근거지가 이의민의 출신 지역이었음을 고려하면, 그 자신의 권력 기반에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따라서 이의민이 저항 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진압보다는 타협적 자세로 나오게 되었던 것이 저항 세력과 연관되었다는 의심을 받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 점은 저항이 벌어진 지 얼마 안 되어 저항의 우두머리인 김사미가 항복하였던 것에서도 추정할 수 있다.

1194년(명종 24) 2월의 자료에서 보면, “남적의 우두머리 김사미가 스스로 행영(行營)에 투항하여 항복을 청하니 목을 베었다.”라고 하였다. 이전의 저항에서도 우두머리가 항복하게 되면 처형하는 예도 있었지만, 대부분 저항 세력의 무마를 위해 위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도 김사미가 즉시 처형되었던 것은 이의민과 저항 세력의 관계에서 그 자신이 의심 받았던 것에 대한 예방책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김사미 · 효심을 중심으로 한 저항 세력들은 1194년(명종 24) 4월 효심이 체포됨으로써 그 세력이 위축되었다.

의의 및 평가

김사미 저항의 발생 · 진행 · 진압되는 과정에는 이에 대처하는 정부와 이의민의 미묘한 처지가 매우 복잡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김사미를 포함한 당시의 저항군 지휘자들이 조직적인 훈련이 부족한 자들을 규합해서 큰 저항을 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주목된다.

이의민 정권은 공적 관료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지만, 사적 지배 기반의 확대는 이전의 집권 무신 세력과 마찬가지로 반대 세력의 반발과 지방 사회의 저항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저항에 대한 수습책 역시 이전의 무신정권과 별반 차이를 발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저항 세력과 결탁하였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1196년(명종 26) 4월 이의민이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제거되는 계기로도 작용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신안식, 『고려 무인정권과 지방사회』(경인문화사, 2002)
김광식, 『고려 무인정권과 불교계』(민족사, 1995)
이정신, 『고려 무신정권기 농민·천민항쟁 연구』(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1)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새문사, 1987)

논문

김호동, 「고려 명종 23년의 ‘신라부흥운동’ 사료 검토」(『신라사학보』 26, 신라사학회, 2012)
김광식, 「운문사와 김사미난: 고려중기 사원세력의 일례」(『한국학보』 54, 일지사, 1989)
김호동, 「고려무신정권하의 경주민의 동태와 신라부흥운동」(『민족문화논총』 2·3집,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변태섭, 「농민·천민의 난」(『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81)
旗田巍, 「高麗の武人と地方勢力」(『朝鮮歷史論集』 上, 龍溪書舍,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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