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승려와 달리 군현(郡縣)의 일반백성처럼 항상 힘드는 일을 수행하며, 토지인 항산(恒産)을 소유하고 있었다. 고려 초기부터 각 사원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어떤 사원에는 1천명을 넘는 경우도 있었다.
형성과정은 확실지 않으며, 군현의 일반백성과는 다르게 파악되었다. 평상시에는 개인적인 일이나 사원의 토지경작·잡무 등에 종사하고, 국난이 닥칠 때에는 징발되어 군대에 편성되었다.
특히 1104년(숙종 9) 윤관(尹瓘)이 건의해 설치한 별무반(別武班) 중에서 승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은 바로 이들로 조직된 부대였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재가화상(在家和尙)’의 존재가 보이는데, 이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 의하면 “재가화상은 가사를 입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았다. 흰 모시의 좁은 옷에 검은 비단으로 허리를 묶고 맨발로 다니는데, 가끔 신발을 신은 자도 있다. 거처할 집을 스스로 만들며, 아내를 얻고 자식을 기른다. 그들은 관청에서 기물(器物)을 져 나르고, 도로를 쓸고, 도랑을 내고, 성과 집을 수축하는 일에 종사한다. 변경에 경보가 있으면 단결해서 나가는데, 비록 달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나 자못 씩씩하고 용감하다. …(중략)…듣기로는 거란이 고려사람에게 패배한 것은 바로 이 무리들의 힘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사실 형벌을 받은 복역인들인데, 이족(夷族)의 사람들은 그들이 수염과 머리를 깎아버렸다고 하여 화상이라고 불렀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