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말여초는 창부(倉部)라고 불렀으나, 983년(성종 2) 향리직(鄕吏職)을 고칠 때 그 명칭을 격하시켜 사창(司倉)이라고 하였다.
신라 하대 이래로 지방의 호족(豪族)들은 중앙의 관제를 모방하여 호부(戶部)·병부(兵部)·창부라는 세 부서로 구성된 독자적인 조직을 운영해왔는데, 고려가 집권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 조직에 대하여 일정한 통제를 가한 것이다. 사창에는 창정(倉正)·부창정(副倉正)·창사(倉史)라는 관직이 있었다.
이들 관직은 많은 토지를 소유한 그 지방의 토착세력이 차지하였는데, 그 정원은 인구의 크기에 따라 달랐다. 1018년(현종 9)의 향리정원규정에 의하면, 창정·부창정은 1, 2인이고 창사는 4∼10인이었다.
한편, 사창은 위로 호장(戶長)·부호장(副戶長)의 지시를 받으면서, 주민으로부터 수취한 각종 물품을 창고에 보관, 출입시키는 것이 그 임무였지만, 이후의 변화·소멸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