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민이 미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무신집권자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12년간 집권할 수 있었던 데는 이지순 등 아들들의 지원에 힘입은 바 있었을 것이다.
1193년(명종 23)에 김사미(金沙彌)와 효심(孝心)이 각각 운문(雲門: 현, 경상북도 청도군)과 초전(草田: 현, 울산광역시)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장군(將軍)으로서 대장군(大將軍) 전존걸(全存傑)의 지휘 아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고려사』에서는 이의민이 신라 부흥에 뜻을 두고 경주 출신인 주1들과 통하였고 이를 빌미로 이지순이 내부 정보를 적에게 누설하고 뇌물을 받는 등 진압군을 곤경에 빠뜨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대장군 전존걸이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는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이 적과 내통하였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이의민은 이미 무신정권의 최고집정자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들이 저항세력과 결탁하려 하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고려사』 이의민 열전에서도 이지순이 김사미의 반적이 가진 재물에 대한 욕심이 강조되어 있지만 이의민과 김사미를 이어주는 역할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진압 책임을 맡았던 대장군 전존걸이 자결함으로써 이의민이 저항세력과 결탁하였다는 의구심을 증폭시켰을 수 있다. 이지순과 김사미의 공모설은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한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 정권의 불법성을 강조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에 의하여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1196년(명종 26)에 이의민은 최충헌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이지순은 정변 소식을 듣고 가동(家僮)을 인솔하여 노상에서 맞서 싸웠으나 세가 밀려 승산이 없음을 알고 도주하였다가 뒤에 죽임을 당하였다. 최충헌이 왕에게 청하여 지후(祗候) 한광연(韓光衍)을 경주로 보내서 이의민의 3족을 멸하게 하고, 각 주(州)로 사람을 파견하여 이의민의 노예와 도당을 죽이고 이현필(李賢弼)을 원주(原州)로 귀양 보냈다. 이에 이지순은 인은관(仁恩館)으로 가서 최충헌에게 목숨을 구걸하였으나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