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쇠고기 장사와 가면극 연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균관 전복(典僕)인 반인 중 일부는 현방(懸房), 즉 푸줏간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속전을 내었다.
현방은 서울에서 소의 도살과 쇠고기의 독점 판매를 담당하던 시전(市廛)의 하나로, 반인들이 운영하였으며 다림방이나 도사(屠肆)라고도 불렸다.
성균관에는 조선 전기부터 문묘제향(文廟祭享)에 필요한 쇠고기를 조달하기 위해 도사(屠肆)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도사는 문묘제향을 위해 특수한 경우로 허락한 것이었고, 반인들도 제향에 쓰고 남은 쇠고기를 판매해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성균관의 주요 재원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자 성균관은 잡역 담당자인 반인들에게 재정 보충의 책임을 맡게 하였고, 반인들은 도사의 운영을 통해 주어진 책임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성균관의 도사는 시전과 같은 기능을 하는 현방으로 재조직된 것이다.
소의 도살은 농업 국가인 조선에서는 철저히 금지되던 삼금(三禁, 牛禁 酒禁 松禁)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상품 경제가 발전하고 소비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쇠고기 수요가 늘어나자, 정부는 반인들이 운영하는 현방에 쇠고기 공급을 독점시킴으로써 도살을 통제하는 방식을 취했다.
국가의 우금(牛禁) 정책하에서 현방의 도살을 합법화시킬 수단으로 제시된 것이 속전이었다. 따라서 현방은 통공정책(通共政策)에 상관 없이 독점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성균관 응역(應役)과 삼사(三司) 속전 납부의 의무를 수행했다.
≪동국여지비고 東國輿地備考≫ 권2 한성부(漢城府) 포사(舖肆)에 의하면, 18세기에는 도성 지역에 23개의 현방이 설치되어 서울 지역의 쇠고기 판매를 담당했다. 서소문 밖에도 현방이 있었는데, 서소문 밖은 바로 애오개이다. 아키바 다카시(秋葉隆)가 산대희의 놀이꾼은 반인이었는데, 아현리에 사는 사람들이 많아 아현(애오개) 산대가 유명했다고 지적한 것은 이 애오개 현방과 관련이 있다.
반인 중 일부는 재인(宰人)으로서 소를 도살하고 푸줏간을 운영하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고, 나머지는 다른 일에 종사했는데, 나례도감에 동원되던 놀이꾼 중에 반인이 있었다. 정조 9년(1785) 왕명으로 성균관에서 편찬한 ≪태학지 太學志≫의 권7 교화(敎化) 조에 반인과 나례도감과의 관련을 보여 주는 기록이 발견된다.
이 기록에는 중국 사신이 올 때 조정에서 나례도감을 설치하고 창우들을 모아 산붕(山棚)을 배설해 맞이했다는 내용과 반인들이 반촌 내에서 산붕을 설치하고 놀이를 연행한 내용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중국 사신 영접시에 나례도감에서 창우들을 모을 때, 당연히 산붕을 설치하고 놀던 반인들도 동원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조실록 12년 2월 22일 조에 의하면, 반인들은 국가적 행사인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도 동원되었지만, 시정에서 ‘설붕잡희(設棚雜戱)’의 공연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설붕잡희는 꼭두각시놀이와 가면극을 가리킨다.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이 남대문 밖에서 본 놀이를 읊은 한시 <남성관희자 南城觀戱子>에서 놀이꾼들이 꼭두각시놀이와 가면극을 함께 공연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반인들도 양자를 함께 공연했다.
유득공의 ≪경도잡지≫에 실려 있는 “연극에는 산희(山戱)와 야희(野戱)의 두 부류가 있는데 나례도감에 소속된다.”는 기록에서, 산희는 꼭두각시놀이를 가리키며 야희는 가면극을 말한다. 산대희가 중지된 이후 18세기 전반기에 반인들이 흥행을 위해 야희와 같은 가면극을 발전시켜 본산대놀이를 성립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18세기 후반에는 강이천이 <남성관희자>에서 묘사한 바와 같이, 현존하는 가면극의 내용을 두루 갖춘 완전한 모습의 가면극이 남대문 밖에서 공연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