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연은 옛날 기록에 보통 지연(紙鳶) 또는 풍연(風鳶)으로 나오는데, 지연이 가장 널리 쓰인 용어이다.
이규보의 한시 <칠월삼일 영풍 七月三日 詠風>에 의하면, 고려시대에는 음력 7월부터 연을 날렸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섣달부터 연을 날리기 시작하여, 특히 정초부터 정월보름 사이에 연날리기가 성행했다.
정월보름날에는 으레 연을 날리다가 연줄을 끊어 연을 날려보냄으로써 액막이를 하면서 연날리기를 마감하였다. 정월보름 이후에도 연을 날리면 ‘고리백정(때를 따라 할 것을 때가 지난 뒤까지 한다고 놀리는 말)’이라고 욕을 했다. 연과 관련된 민속은 연싸움과 액막이연이 있다.
연싸움은 ‘연줄 끊어먹기’와 ‘연 높이 날리기’가 있다. 연싸움은 장유의 한시 <지연 紙鳶>, 정범조의 ≪해좌집 海左集≫, 유득공의 ≪경도잡지 京都雜志≫, 이학규의 ≪낙하생문집 洛下生文集≫, 김매순의 ≪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 홍석모의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 등에 기록되어 있다.
서울에서의 연싸움은 상원 전 하루 이틀 전에 청계천 수표교에서 성행했다. 연날리기 장소는 해마다 청계천 가가 이용되었다.
여기서 편을 갈라서 연날리기를 하면 기생과 왈패(曰牌:말이나 행동이 단정하지 못하고 수선스러운 여자)들이 응원을 하고 음식을 차려서 기세를 올렸다. 개천 양쪽에는 일반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낙하생문집≫의 <풍연시 風鳶詞>는 서울의 유협아 즉 풍류랑(풍치가 있고 멋스러운 젊은 사람)들이 팔모얼레(연 실을 감는데 쓰는 기구)에 명주실을 감아 연을 날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한시에 의하면 연줄이 길어야만 연싸움 기술을 자랑할 수 있다고 한다. ≪경도잡지≫에서는 연싸움을 위해 연줄에 아교, 사기가루, 구리가루를 바르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풀은 말린 민어 부레를 끓여 만드는데, 여기에 사기가루나 유리가루를 섞는 것을 ‘가미’라고 한다.
액막이연은 정철의 시조 <속전 지연가>, ≪조선왕조실록≫ 명종 21(1566)년 1월 15일조, 이안눌의 ≪동악집 속집 東岳集 續集≫의 <上元>, 김정희의 ≪완당선생집 阮堂先生集≫ 권10의 <원소술회 元宵述懷>, 유만공의 ≪세시풍요 歲時風謠≫ 등에 기록되어 있다.
‘액막이연’에다 ‘厄(액)’자 한 자를 쓰거나 ‘送厄(송액)’ 혹은 ‘送厄迎福(송액영복)’이라는 액을 막는 글을 쓴 후, 자기의 생년월일과 성명을 적는다.
서울지역의 연날리기 기능보유자로 노유상(盧裕相, 1904년생)이 있다. 노유상은 1956년 한국일보사 주최로 열렸던 제1회 전국연날리기대회 이후 매년 이 행사에 선수로 또는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다. 그는 색동치마연 · 색동허리동이연 · 나비연 · 원앙연 등 100여 종의 연을 만든다.
노유상의 연 제작법은 장살 붙이는 방법이 특징적이다. 전통적인 방법에서는 장살을 붙이는 데 받침대와 소도구를 사용한다.
그러나 노유상은 장살 붙이는 방법을 새롭게 개발하여, 받침대나 소도구가 필요 없이 맨손으로 쉽게 장살을 붙이고 있다. 즉, 장살의 아래쪽만을 붙여 놓은 상태에서 교차되는 두 장살 중 상단에 있는 장살의 윗 부분에 먼저 풀칠을 한다.
그리고 양손의 검지손가락으로 머릿살과 장살이 만나는 양 귀 아랫부분을 받쳐준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장살을 앞으로 민다. 그러면 장살이 앞으로 밀리면서 연의 배가 튀어나오게 된다.
이 때 적당히 배가 나온 상태에서 이미 풀칠을 해 둔 상단의 장살은 손으로 잡고, 풀칠 안한 아랫 장살은 놓는다. 그리고 풀칠한 윗 장살을 연 종이에 붙인다.
다음에는 하단의 장살 윗 부분에도 풀칠을 한 후 장살을 아래쪽으로 민다. 그러면 하단의 장살이 앞으로 밀리면서 살짝 떴다가 상단의 장살과 닿는 순간 고정시킨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장살 위를 누르면서 종이에 붙인다. 다음 연을 뒤집어 방구멍이 책상 모서리 바깥으로 나가게 올려놓고 각 살 위의 종이 부분을 돌려 가면서 문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