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을 퇴치하고자 하는 오랜 인류의 노력은 현대과학의 발달과 함께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어 왔다. 그러나 현대문명이 발달한 오늘에 있어서도 우리 인류는 질병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계속 방역사업은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세계 많은 국가들은 그 국민의 건강증진을 위하여 적절한 보건의료시책을 펴나가고 있으며, 특히 전염병 관리에 있어서는 이미 18세기부터 국방과 사회안전의 견지에서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우리 나라에서도 그간 국민보건향상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여 왔으며, 최근 국력의 신장과 더불어 적극적인 의료시책의 확충과 생활수준 · 보건의식의 향상으로 우리 나라의 급성전염병 발생은 현저하게 감소되고 있다.
그러나 일부지역의 안전급수시설의 미비, 오래된 식생활습관, 우수방역요원의 확보난 등은 방역사업수행에 큰 취약점이 되고 있다. 따라서 방역사업을 과학화, 체계화하여 질병 없는 살기 좋은 복지사회건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단군 건국으로부터 부여시대, 위만조선을 지나 삼한까지의 약 2000여년 동안 공중보건 · 방역사업에 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부여는 군사가 있으매 천(天)에 제(祭)하고 우(牛)를 살(殺)하여 제(蹄)를 보아 길흉을 점(占)하는데 제(蹄)의 해(解)가 흉(凶)이고 합(合)한 것이 길(吉)이다.” 하고, “예(濊)는 성수(星宿)를 후(候)함을 효(曉)하여 미리 연세(年歲)의 풍흉을 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내용 중의 우제점술(牛蹄占術)이 질병의 예후(豫後)를 판정하는 데 적용되었으리라는 것은 주보(朱輔)의 ≪계만총소 溪蠻叢笑≫에 “동중(洞中)이 군사승부(軍事勝負) 및 질병기도(疾病祈禱)에 모두 우(牛)로써 점(占)한다.”고 씌어 있는 데에서 짐작할 수 있다.
≪계만총소≫는 원래 남방 오계만족(五溪蠻族)들의 풍속을 주로 기록한 것인데, 그 사실을 곧 동방민족에까지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부여족이 남방민족과 같이 군사 외에 질병기도에 우제점 같은 술법을 적용하였으리라고 생각됨은 원시심리의 유동성(類同性)으로부터 추상(推想)할 수 있는 일이다.
역(疫)은 후한(後漢)허신(許愼)의 ≪설문 說文≫에 “민개질야(民皆疾也)”라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모두 병든다는 것이므로 그 병종이 유행성으로 발생된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발생의 원인에 있어서는 역시 후한 유희(劉熙)가 지은 ≪석명 釋名≫에 “역은 역야(役也)니 귀(鬼)가 있어 역을 행함을 이름이라.”고 기록한 것과 같이 역귀(疫鬼) 때문으로 돌렸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역질(疫疾) 중에서 장티푸스 · 발진티푸스 · 유행성감모(流行性感冒) · 두창(痘瘡:천연두) 및 말라리아 또는 그들의 유사질환 등을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각종의 유행성전염병 중에 티푸스성질환, 특히 장티푸스 및 발진티푸스 같은 질환은 옛날부터 중국에서 유행되어 오던 역 · 온역(瘟疫) · 여역(癘疫) 등에 비정될만한 것이라는 것이 이미 인정되어 있으며, 때로는 상한(傷寒) 및 시행병(時行病) 등의 이름으로도 통용되어 왔다.
그 밖에 두창 등 특수전염병질환도 대체로 그 중에 포함되었으리라는 것이 이미 용인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류의 유행성전염병들이 중국과 인접되고 그 중에도 특히 문물의 왕래가 빈번한 고구려나 백제의 지역에 으레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역질의 예방과 구료(救療)는 의료보호정책의 중요한 임무이다. 그러나 역질이 유행될 때에는 중앙으로부터 그 지방에 의원과 약재를 보내고, 또는 조관(朝官)이나 진휼사(賑恤使)를 따로 보내어 불제(佛齊)로 역질의 유행을 방지하려고 힘써 왔다.
이러한 구치(救治)의 방법은 역질이 귀신이나 불벌(佛罰)로써 생긴다고 믿던 당시에는 면하기 어려운 일이나, 역질의 유행을 방피(防避)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이 강구되어왔다.
이제 주요한 예를 몇 가지 들어보기로 하겠다. 1396년(태조 5) 3월 한양의 성(城)을 구축할 때에 군졸에게 역병이 유행되므로 의사를 보내어 진맥(診脈) · 제약(劑藥) · 구료하게 하였으며, 1392년(태조 1) 정월에 “원억(寃抑)을 포(抱)한 귀(鬼)가 질역을 생(生)하고 화기(和氣)를 상(傷)하여 변괴(變怪)를 치(致)하니 여제(癘祭)를 행할 것이다.” 하였고, ≪주례 周禮≫에 수록되어 있는 하관행화(夏官行火)에 의하면, 1397년 3월에는 화(火)로 인한 여질의 발생을 예방하게 하였다.
1434년(세종 16) 6월에는 외방질역구료(外方疾疫救療)의 법이 육전(六典)에 실려 있으나 수령이 잘 구료하지 못하며, 또는 구료의 방법도 자세하지 않다 하여 ≪성혜방 聖惠方≫ · ≪천금방 千金方≫ · ≪경험양방 經驗良方≫ 등에 적혀 있는 방문들을 예시하여 온역 및 상한 등의 치료법을 알리게 하였다.
1438∼1446년에 이르기까지 황해도 각 군에 악질이 계속되므로 의원 및 의약을 보내어 구료하는 이외에 각 수령에게 명하여 친히 여제를 행하게 하였으며, 혹은 민원에 따라 불법(佛法)에 의한 수륙제(水陸齊)를 베풀기도 하였다. 그뒤 경성 및 경기지방에 역려(疫癘)가 크게 유행하여 고려 숙종 때에 행하였던 방법으로 온신(瘟神)에게 제사를 드려 병을 물리치게 하였다.
그리고 문종 1년(1451)부터 2년에 걸쳐 경기 및 황해지방에 유행된 악질(惡疾)의 구치약으로, ① 약제와 침구를 겸용하는 이외에 개성부 · 활민원(活民院)을 수리하여 병자를 모아 목욕(沐浴) · 증위(蒸慰)의 법을 겸용하게 할 것, ② 벽사(辟邪)의 약을 소(燒)하여 역기(疫氣)를 소산(消散)하게 하며, 혹은 병인(病因)으로서 벽사의 약을 몸에 지니게 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그리고 ③ 약 및 불법수륙제에 의하여 그 기(氣)가 스스로 약하게 하도록 할 것, ④ 여귀(癘鬼)는 제사를 드려 그 기가 없어지게 하고, 또는 각 주 · 군(州郡)에 여제단(癘祭壇)을 설치하게 할 것, ⑤ 양진부주(穰鎭符呪)에 의하여 악질의 유행을 치료하게 할 것과 같은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그 뒤 1485년(성종 16) 1월에는 악질이 유행하는 것은 전망고혼(戰亡孤魂)의 원결(寃結)이라 하나, 역시 산천독기(山川毒氣)가 떠다니면서 이루어진 화(禍)이므로 도선(道詵)의 ≪산천비보서 山川裨補書≫에 의하여 진양(鎭穰)을 거듭 밝히고자 하는 풍수설에 따라 역을 쫓아내려는 여제를 실행하였다.
1577년(선조 10) 1월에는 충청도에 여역이 만연하므로 의관을 보내어 제약구치하게 하고 또는 담제(擔祭)를 지내게 하였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에 여역이 발생될 때에는 중앙정부로부터 의원의 파견, 약재의 배송(配送), 의방서(醫方書)의 간행 외에 여제 · 불제 · 벽사 · 양진 · 부주 · 산천비보 · 축역 · 나례 · 담제 등 여러 가지 방법들이 이용되었다.
우리 나라는 지리적으로 남으로 일본과 접하고 서북으로 중국과 접근하고 있어 유행성전염병독의 침입을 여러 차례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서양의학이 전래되면서 우리 정부로도 전염병예방에 관한 법규를 발포하여 전염병의 박멸과 그 병독의 만연을 방지하는 데 엄격한 행정적 조처를 취하여 왔다.
1915년 9월에 <전염병예방령>을 다시 발포하고 그해 8월 1일에 세칙법규를 시행하였는데 이 예방령에 규정된 전염병은 콜레라 · 적리(赤痢) · 장티푸스 · 파라티푸스 · 두창 · 발진티푸스 · 성홍렬 · 디프테리아 · 페스트 등 9종이다.
그뿐 아니라 전염병이 유행하거나 또는 유행할 징조가 있을 때에 검역위원을 두어 선박 · 기차 및 여객의 검역과 함께 해항검역(海港檢疫)을 실시하여 예방령의 규정 중에 있는 청결방법 및 소독방법의 시행, 전염병환자의 취급 및 소독상의 주의 등의 엄밀한 규정 및 벌칙들이 제정되었다.
이들 9종 전염병에 대한 예방방법은 그 원인균의 특수생활, 기능과 병독의 침입경로의 차이, 병증의 완급 등에 따라 각각 달리하였다.
전염병의 발생, 유행양상을 파악하게 되면 환자의 격리수용 · 치료, 보균자에 대한 치료, 전염원과 전파경로의 차단을 할 수 있다.
방역을 환자발생시 방역과 평상시 방역으로 크게 구분하여 실시하는 경우도 있다. 모두 병원체, 전파경로, 감수성 숙주 등 전염병 발생의 3대 요인에 대한 소독 · 치료 · 격리 · 예방접종 등 합리적인 방역조처를 신속하게 하는 것이다.
(1) 환자발생
전 방역대책 어느 지역에 유행하거나 또는 산발적으로 발생되는 전염질환에 대한 예방조처는 환자발생 전에 실시되어야 하며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① 물과 식품:소화기에 생기는 전염병의 예방책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음료수와 식품의 관리이다. 음료수는 수도물이나 소독된 물을 쓰도록 하며, 식품은 될 수 있으면 생식을 금하고 식품이 소비자의 손에 들어올 때까지의 전 과정에서 오염되지 않도록 감시하며, 식품의 저장과 식품취급자의 건강관리에 유의한다.
② 주택:위생적인 변소를 만들고 창에는 세망을 치고 쥐가 살 수 없도록 집의 구조를 개량하며, 집주위에 있는 파리나 모기가 생길만한 곳을 없앤다. 될 수 있다면 조그만 방에 여러 식구가 살지 않도록 하고 목욕을 자주 하고 의복도 자주 갈아입도록 한다.
③ 전염원 제거:전염원을 없애도록 한다. 보균자의 치료는 물론이고 매개충을 없애도록 환경을 정리하고, 살충제를 뿌리며 병원소가 되는 여러 가지 동물에 대한 방비를 하고 가능하면 없애도록 한다.
④ 면역:예방주사가 있는 전염병이라면 미리 예방접종을 실시하여 저항력을 강화하는 한편 개인의 건강관리에 힘쓰도록 한다.
⑤ 보건교육:예방대책이나 전염병 발생시의 조처 및 개인위생의 생활화 등에 대하여 주민에게 교육하여 각 개인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도록 한다.
(2) 발생 후의 대책
일단 환자가 발생한 다음에 취하는 대책은 특정한 전염병에 대한 조처이므로 구체적이고 적극적이며 중점적인 것이 특징이다.
① 발생보고:<전염병예방법>에 규정된 전염병이 발생하면 보건당국에 전염병환자 등을 진단하였거나 의사가 그 시체를 검안하였을 경우, 즉시 또는 7일 이내에 보고할 의무가 있다. 의심되는 환자 및 전염병 병원체보유자도 같은 방법으로 보고하여야 한다.
② 병리검사:전염병의 의심이 있는 환자는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미생물학적 검사를 실시하는데, 이 검사는 강제성을 띠고 있다.
③ 격리:제1군 및 3군 전염병 환자 등은 격리시킨다. 격리할 시간은 전염성이 없어질 때까지이며 그 기간은 <전염병예방법> 시행령에 규정되어 있다.
④ 검역:환자가 아닌 접촉자도 일정한 장소에 격리하고 행동을 제한할 때가 있다. 이 기한은 원칙적으로는 그 전염병의 잠복기간이지만 격리도중에 새로운 환자가 발생하면 이때부터 다시 계산하여 연장한다. 이러한 행동의 제한은 외국에서 온 선박에도 적용된다.
⑤ 소독:환자의 배설물이나 사용하던 물건을 소독하고 마지막에는 병실이나 침구를 포함한 모든 것을 소독한다. ⑥ 면역:필요하면 환자발생지역의 주민들이나 또는 접촉 우려가 있는 자에게 중점적으로 예방접종을 실시한다.
⑦ 감염원 조사:전염병이 퍼지는 근원을 조사하여 감염원을 제거하도록 한다. 사람의 경우는 보균자는 물론이고 환자도 새로운 감염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유의하여야 한다.
(3) 면역처치
병원체의 침입으로 생긴 전염병이 발병에 이르느냐 또는 불현성전염에 그치느냐 하는 문제는 병원체의 독성과 숙주의 저항력으로 이루어지는 힘의 균형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느냐에 달려 있다. 숙주의 저항력을 강화하여 모든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이상적이지만 비특이적인 저항력을 증가시켜보자는 것이 예방접종이다.
우리 나라의 의학은 한반도에 민족의 종족적 구성이 어느만큼 완성된 환웅천제(桓雄天帝)시대로부터 시작하였다고 할 것이나 어떤 체계를 이루지 못하다가 중국에서 전래된 ≪황제신농씨업 黃帝神農氏業≫을 받아들여 수천 년간 우리 민족의 치병술로 삼았다.
조선 말기에는 서양문화가 홍수처럼 밀려 왔으나 안으로는 완고한 사상에 머리가 젖었고, 밖으로는 한반도를 탐식하려는 열강의 마수로 인한 소란한 정정(政情)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주변 다른 나라에 비하여 문화의 발달이 늦어짐을 면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신의학이 도입된 후에도 수천년간 의뢰해 온 한의학에 대한 고루한 사고방식과 민간요법들로 그의 보급이 지연되었다.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행한 보건정책은 식민에 중점을 두었고 우리 나라 사람에 대한 시책은 오로지 일본인을 안전하게 하는 수단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항상 우리의 거주의 불결, 위생관념의 유치함을 비난만 하였고, 그의 원인을 구명하여 제거하거나 또는 적극적으로 어떤 향상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전염병에 관한 기록은 백제 때인 서기전 15년(온조왕 4)에 ‘백제기섭(百濟飢燮)’이 가장 오래된 것 같고, 삼국시대와 고려 때에는 ‘경도대역(京都大疫)’이라는 구절을 여러 고문헌에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역대치(癘疫大熾)’, ‘염병치성(染病熾盛)’이라는 문구를 여러 가지 문헌에서 많이 볼 수 있으나 어떤 역병을 지적함인지 전혀 알 수 없고, 그 중 콜레라 · 두창의 유행은 가끔 있어서 그로 인한 인명의 피해는 더욱 참혹하였던 것 같다.
최근에는 6·25전쟁이라는 전염병 발생의 호조건에 편승하여 여러 가지 중독한 질병의 유행적 발생이 있었으며, 기존병독의 지역적 확산도 있게 되고 또한 몇 가지 새로운 전염성질환의 출현도 있었다.
이와 아울러 외래자, 즉 한국 역병에 대하여 미접촉자인 유엔군 장병에서 발생경험된 역학적 사실에 의하여 이제까지 불명료하였던 역병의 실태가 명확하게 파악되었으며, 최근 발달된 방역대책과 화학요법을 채택, 시행하게 되어 크게 주효를 거두게 되었다.
또, 약제사용 통제불능과 무비판사용에 의한 항균제의 남용은 전염병 발생의 양상을 혼란하게 하여 놓았으며 임상적으로는 변증과 이상 과정을 초래하였고, 이와 아울러 병증진단에 곤란이 생겨 방역면에서도 많은 발전을 가져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