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관창리 유적 ( )

보령 관창리 유적 전경
보령 관창리 유적 전경
선사문화
유적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에 있는 청동기시대 집터와 가마터 · 방형도랑무덤 관련 복합유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에 있는 청동기시대 집터와 가마터 · 방형도랑무덤 관련 복합유적.
개설

서해안과 인접한 해발 100m 내외의 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의 높이 약 35m 이하 지역에 있다. 이 유적은 (주)대우의 관창공단 조성과 관련해 1995년 11월부터 1996년 10월까지 고려대학교·대전보건대학·아주대학교·충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그 결과 고인돌[支石墓]·돌널무덤[石棺墓]·무논[水田]·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를 비롯해 철기시대 독무덤[甕棺墓], 조선시대 일반무덤[民墓] 등이 확인되었다. 고려대학교박물관이 조사한 지역에서만도 집터 200여 기 이상과 방형주구묘 103기, 무논 유적 2,000여 평 등이 확인되었다.

내용

집자리는 원형의 평면 중앙에 타원형의 움[土壙]을 판 형태의 송국리형(松菊里型)이다. 크기는 지름 10m가 넘는 것에서부터 4∼5m의 작은 것까지 다양하다. 특히 이 유적의 집자리는 내부의 벽면을 따라 깊이 5∼10㎝, 폭 10㎝ 내외의 구(溝)가 시설되어 있다. 집자리 내부 출토유물은 복원 가능한 완형(完形) 토기류 200여 점, 돌칼[石劍]·돌도끼[石斧]·돌화살촉[石鏃]·숫돌[砥石] 등의 석기류 500여 점이 있다.

집자리와 더불어 생활용기를 제작했던 요지(窯址) 30여 기, 곡식 등을 저장했던 저장시설 50여 기, 고인돌·돌널무덤을 비롯한 20여 기의 무덤이 공간 배치를 달리하며 확인되었다. 무덤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방형주구묘이다. 방형주구묘는 총 103기가 확인되었다. 규모는 한 변이 20m를 넘는 대형에서 7∼8m 정도의 작은 것까지 매우 다양하다. 무덤은 성토(盛土)부분이 오랜 세월로 인해 소실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남아있는 상태로 보아 움을 파서 널 또는 돌널을 안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유물은 토기류가 대부분이나, 청동거울[銅鏡]·대롱옥[管玉]·쇠투겁창[鐵矛] 등의 금속류도 함께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의 무논 유적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폭이 좁은 계곡부의 중앙을 관통하는 하천을 정비해 수리시설을 갖춘 뒤, 그 양쪽을 무논으로 사용한 습지형(濕地形) 무논이다. 수로(水路)는 무논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일시적으로 가두어 두거나 다시 다른 무논으로 들어가게 하는 정교한 보(洑) 시설을 하고 있어서, 당시 무논 경작은 물론, 토목·관개(灌漑)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로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구릉 집자리에서 출토된 송국리형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징

집자리의 경우, 집자리 바닥면과 실제 생활면이 구분된 토층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집자리 폐기후 토사가 퇴적될 때, 평상(平床)과 같은 인공시설물이 함몰되어 유기물질이 혼입된 흔적이 있었다. 이는 다른 송국리형 집자리와는 구분되는 특징적인 현상이다.

방형주구묘의 경우, 축조시기는 두형토기(豆形土器)를 중심으로 덧띠토기[粘土帶土器]·검은간토기[黑色磨硏土器]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 4세기 후반 이후이며, 기원전 3∼2세기에 집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경우 방형주구묘는 농경사회단계인 야요이(彌生)시대의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긴키[近畿]지방을 중심으로 축조되어,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등장하는 4세기 전반까지 지속된 묘제이다. 이로 보아 이 방형주구묘는 일본 주구묘의 기원과 일본 고대문화를 이룩한 세력집단의 실체 등에 대한 문제점을 풀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주목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방형주구묘와 청동기시대의 무논 유적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방형주구묘는 한국 선사와 고대문화의 일본에 대한 전파의 실상을 밝혀 준다. 무논은, 농업생산이 관창리의 청동기시대 취락지 주민들의 생활기반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우리나라 생활기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관창리취락지의 사람들은 구릉에 입지한 유적이 일반적으로 영위하던 생계경제 방식 즉, 어로활동을 제외한 농경·수렵·채집을 병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다른 유적과의 조성비 비교를 통하여 볼 때, 수렵이나 농경활동의 비율이 뚜렷하게 높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채집활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관창리 유적』(한국고고환경연구소, 2001)
『관창리 주구묘』(한국고고환경연구소, 1997)
『관창리 주구묘』(고려대학교 매장문화연구소, 1997)
「마제석기 분석을 통한 관창리유적 B구역의 성격 검토」(손준호, 『한국상고사학보』제51집, 2003)
「보령 관창리유적A, F지구 발굴조사 개보」(아주대학교 박물관, 『과기고고연구』 1, 1996)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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