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대천전문대학 설립으로 인한 발굴조사에서 고려대학교·충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확인되었다.
유적은 관산리를 감싸고 있는 배재산의 동서방향 지구릉(枝丘陵)에 입지하여, 구릉 중앙부 해발고도 약 45m 부분에서부터 아래쪽으로 완만한 사면에 분포하고 있다.
남쪽 경사면은 완만하나 북쪽은 경사가 비교적 급한 편이기 때문에 유구의 분포도 구릉 정상부와 남쪽 경사면에 집중되어 있다. 청동기시대 유구로는 집자리 16기, 돌널무덤[石棺墓] 5기가 확인되었다.
집자리는 구릉 정상부나 바로 아래의 남쪽 경사면에 집중되어 있다. 장방형(長方形)이 중심이며 방형(方形)과 원형(圓形)은 그보다 아래쪽에 있다.
정상부의 장방형 집터는 지금까지 조사된 남한 지역 집터 중 규모가 큰 편에 속하며, 너비 5.8m, 길이 20.40m이다. 이 집자리는 외곽에 원형의 출입구를 갖추고, 내부는 벽면을 따라 점토로 너비 1m의 침상(寢牀) 형태 단(段)을 설치한 뒤, 5m 간격으로 4칸의 독립된 방을 만들어 각 방마다 화덕[爐址]시설을 한 매우 특이한 구조이다.
돌널무덤은 모두 괴석으로 축조되었으며, 일부는 뚜껑을 2∼3장 겹친 것도 있다. 출토된 토기는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와 겹아가리[二重口緣]의 혼합된 형식에 빗금무늬[短斜線文] 등이 시문되어 있다. 석기는 돌도끼[石斧]·반달칼[半月形石刀]·돌화살촉[石鏃]·돌칼[石劍]·숫돌[砥石]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집자리에서 채취한 목탄을 이용해 방사성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유적의 조성시기는 기원전 9∼7세기로 확인되었다. 23기에 달하는 고려·조선시대 집자리는 대부분 원형의 움집으로, 북쪽 또는 북서쪽에 괴석과 점토를 이용해 부뚜막을 설치하였다. 집자리에서 출토된 자기류는 분청사기(粉靑沙器)가 주류를 이룬다.
집자리 주변에는 소규모 집단의 자급을 위한 토기가마터와 파괴된 돌덧널무덤[石槨墓]·널무덤[土壙墓] 등이 일정한 공간을 이루면서 분포하고 있어, 당시의 취락구조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