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8월 마을주민에 의하여 신고된 분청사기인화문(粉靑沙器印花文) 대접 2점으로 인하여 그 존재가 알려져, 같은 해 10월 부산직할시립박물관(지금의 부산박물관)이 유물출토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하였다.
해발 59m의 남서사면에 위치하며, 조사 당시 유적은 마을진입로공사로 인하여 파괴되고 극히 일부만 남아 있었으며 현재는 도시화로 인해 모두 소멸되었다. 조사된 유구(遺構)는 동서길이 3m, 현재 남아 있는 남북길이 1.3m, 깊이 50㎝의 수혈(竪穴) 1기이다.
도로확장시 서쪽부분이 완전히 파괴, 유실되어 정확한 크기와 형상은 알 수 없으나, 3×3m의 말각방형(抹角方形)의 수혈주거지로 추정된다.
수혈의 동북구석에서 소형의 석조유구 1기가 확인되었다. 2매의 판상할석(板狀割石)을 30㎝ 간격으로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1매의 할석을 덮은 간단한 화덕이다. 화덕 앞에서 발굴조사 전 분청사기인화문대접 2점이 출토되었다.
마을주민들에 의하면 주택지 조성시 자기·청동제수저·철제유물 등이 출토되었다고 하므로 이 지역이 분묘지일 가능성이 높다. 조사된 유구는 수혈 내부의 상황으로 보아 단기간 사용된 것이며 분묘주위에 설치된 일시적인 움막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이 모두 인화문분청사기편이고 인화문이 변형된 소국화문(小菊花文)이므로, 유적의 연대는 조선 전기말로 볼 수 있다. 분청사기 인화문대접 2점은 부산광역시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