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함경남도 안변 일대에 설치되어 있었다. 비열홀은 본래 고구려의 군(郡)의 하나로 이곳에 설치되었는데, 신라가 진흥왕 때 이곳을 장악하면서 주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일찍이 300년(기림이사금 3) 2월에 신라의 국왕이 이곳을 순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곳이 신라의 영토가 된 것은 진흥왕 때의 일이므로 이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은 556년(진흥왕 17)에 이 곳에 주를 설치하고 사찬(沙飡) 성종(成宗)을 초대 군주(軍主)로 삼았다. 561년에 건립된 창녕의 신라진흥왕순수비에 나타나는 이른바 사방군주(四方軍主) 가운데 하나인 ‘비리성군주(碑利城軍主)’의 ‘비리성’은 바로 이 비열홀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 뒤 568년 10월 이를 없애고 대신 강원도 고성을 치소(治所)로 한 달홀주(達忽州)를 두었다. 그러다가 668년(문무왕 8) 3월 기존의 우수주(牛首州 : 치소는 春川)를 없애는 대신 다시 비열홀주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龍文)을 총관(摠管)으로 삼았다.
또 673년에는 비열홀주를 없애고 다시 우수주를 두었다. 신라의 동부 지방에서 이처럼 주가 자주 변동되었던 것은 그 때마다의 군사·정치적인 상황의 변화에 따라 신축성 있게 이를 이동했기 때문이다.
효소왕 때 이곳에 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1,180보(步)였다. 경덕왕 때 지명을 개정하면서 이 곳의 명칭을 삭정군(朔庭郡)으로 바꾸었으며, 그 뒤 ‘비열홀’이라는 지명은 행정 구역 명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