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의 동·서·남쪽에 설치된 공영시장을 관리하던 동시전(東市典)·서시전(西市典)·남시전(南市典) 등 여러 관청에 각기 2인씩 두었는데, 본래의 명칭이 ‘서생(書生)’이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창고 안 물품의 재고조사나 회계장부 따위를 맡았던 듯하다.
759년(경덕왕 18) 정월 서생을 중국식 명칭인 사직으로 고쳤으나, 경덕왕의 이른바 한화정책(漢化政策)이 실패로 돌아간 뒤인 776년(혜공왕 12) 정월 본래의 명칭으로 복구되었다. 조위(造位, 일명 先沮知) 이상에서 대사(大舍)까지의 관등을 가진 자로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