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치량(穉良). 서명백(徐命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인수(徐仁修)이고, 아버지는 판서 서유경(徐有慶)이며, 어머니는 이강중(李剛中)의 딸이다.
1802년(순조 2) 정시 문과에 장원하였으며, 1804년 암행어사로 적합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808년 평안도암행어사로 나가 조득영(趙得永)의 실정에 대해 보고하였지만, 조득영의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김씨의 탄원으로 도리어 서능보가 파직당하였다. 이후 복직되어 1810년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되고, 이어 교리(校理)가 되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관서순무사(關西巡撫使) 이요헌(李堯憲)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그 뒤 승지를 거쳐 1816년 강화부유수가 되고, 이어 황해도관찰사·이조참판·대사간·광주부유수·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828년 이조판서에 승진하였다. 이듬해 한성부판윤·형조판서를 지내고 1830년 다시 이조판서가 되어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겸하다가 좌참찬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