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에 있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충수 정문(旌閭).
내용
1636년(인조 14) 김함의 손자며느리인 통덕랑(通德郞)과 김배(金培)의 부인 온양정씨(溫陽鄭氏)는 경기도 이천군 자래동에서 호란을 당하였다. 당시 슬하에는 어린 두 딸이 있었으며 정씨 또한 젊은 나이였다.
호적들의 침입이 이천까지 이르자, 정씨는 어린 딸을 등에 업고 큰 딸과 함께 집 뒤의 거마산(巨馬山)으로 피신하였으나, 적의 추적으로 수모를 면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정씨는 부도(婦道:아녀자의 도리)를 지키고자 어린 두 딸과 함께 절벽 아래 깊은 못에 몸을 날려 순절하였다.
이후 1700년(숙종 26)에 충수(忠守)의 증손인 후(垕)의 상서로 정려(旌閭:효자 · 충신 · 열녀 등을 기리는 문을 세워 표창하는 것)가 세워지고 1740년(영조 16)에 열부로 명정(命旌)되었다. 세 모녀의 무덤은 이천군 자래동 언덕에 일구삼총(一丘三塚)의 모양을 하고 있다.
김함의 6대손 통덕랑 김익성(金益聖)의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남편이 중병을 앓자 단지수혈(斷指輸血: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먹이는 것)하는 등 온갖 정성으로 간호하였지만 끝내 숨지고 말았다. 한씨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행하고자 하였으나 자식이 없는 까닭에 남편의 뒤를 따라 순절하였다.
1737년(영조 13)에 7대손 동현(東賢)의 상서로 열부에 명정되었다. 전후 100년에 절의(節義)가 상망(相望)하여 한 가문에서 충신과 효자 각 1명, 정절(貞節) 2명이 나왔고, 『삼강행실속록(三綱行實續錄)』에 기록되는 등 후세의 귀감이 된다.
김함의 효자정문은 원래 1606년(선조 39) 월래동(月來洞 :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에, 1737년에는 한씨 부인의 정렬정문(貞烈旌門)이 세워졌다. 1754년(영조 30) 증손 시집(時集)과 현손 순구(舜九) 등이 한 칸의 집을 개축하여 사면에 현판을 달았다.
당시 참판 민우수(閔遇洙)가 글을 찬(撰:기록)하고 정문(旌門), 현판(懸板), 음각(陰刻)은 생원(生員) 안상우(安相祐)가 기록하였다. 현존 건물은 1958년 고삼(古三) 저수지 관개공사로 응봉산(鷹峰山) 아래 네 칸으로 확장 이전한 것이다.
참고문헌
- 『안성군지』(안성군지편찬위원회, 1990)
- 『안성의 얼과 맥』(오환일, 1993)
- 『경기도문화재대관』(경기도, 1998)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