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6년(우왕 2) 밀직부사(密直副使)·해도상원수(海道上元帥)를 겸임하였다가 1377년 만호(萬戶)가 되었다. 이 때 왜적이 밤에 착량(窄梁: 지금의 수원 지역)에 들어와 전함(戰艦) 50여 척을 불태우니 죽은 자가 1,0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손광유는 화살에 맞아 배를 타고 도망하여 겨우 위기를 면하였다.
이보다 먼저 최영(崔瑩)이 착량강 어귀에만 머물며 군대의 위엄을 보이고 바다에 나가지 말도록 지시하였는데, 손광유는 이를 어기고 착량을 떠나 술을 마시고 깊은 잠이 들었다가 참패를 당한 것이었다. 이에 집이 적몰되고 유배되었다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이성계(李成桂)·조민수(曺敏修)가 실권을 잡은 뒤인 1388년(창왕 즉위년) 8월 창왕(昌王)의 생일을 기하여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