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용강(龍岡) 출신.
서울의 양정중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8·15광복을 맞아 38선으로 국토가 분단된 뒤에도 고향으로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신탁통치반대 및 반공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1952년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54년부터 경향신문사 기자로 일했고, 1960년에는 그 신문의 정치부장이 되었다. 4·19혁명 후 제2공화국의 장면(張勉)정권이 출범하면서 장면 국무총리의 공보 비서관이 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장면정권이 붕괴되면서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1963년 정치활동이 허용됨에 따라 창당된 국민의 당의 대변인이 되었다.
1967년 6월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선거에서 통합야당인 신민당의 후보로 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당선되었고, 같은 해 신민당의 대변인이 되었다. 1971년 5월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동대문 갑구에서 신민당후보로 당선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되고 정치활동이 금지됨에 따라 정치활동을 중단하였다가, 1973년 2월 실시된 제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동대문구에서 신민당후보로 당선되었다. 1974년에는 신민당 서울시지부 위원장이 되고, 1976년에는 신민당의 원내총무가 되었다. 1978년 12월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동대문구에서 당선되었다.
1980년 5·17로 국회가 해산되고 기성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이 금지됨에 따라 정치활동을 중단하였다. 1985년 정치활동금지에서 풀려나, 같은 해 2월에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 구 야당인사들이 중심이되어 새로 창당한 신한민주당의 후보로 동대문구에서 당선되었다. 1987년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의 추종자들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의 창당에 참여하였다.
1987년 10월 통일민주당이 대통령후보 선정문제로 김영삼계의 잔류파와 김대중계의 탈당파로 분당될 때 잔류파로 남았다. 1988년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저서로는 『내일을 위한 대화』·『제2공화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