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치승(致承). 호는 사복재(思復齋). 아버지는 송경옥(宋景玉)이며, 어머니는 언양김씨(彦陽金氏)로 김상수(金尙修)의 딸이다. 처음 이희석(李僖錫)에게 수학하고, 뒤에 김평묵(金平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명리를 따르지 않고 오로지 학문을 익히는 데에만 전념하여 여러 지구(知舊) 등과 강수계(講修契)를 세우고, 그의 고조부인 송익호(宋翼顥)가 지은 「추연백록동규(推演白鹿洞規)」를 강규(講規)로 삼고 강마(講磨)하는 데 힘썼다.
1888년(고종 25)에는 가평의 조종암(朝宗巖)을 내왕하면서 당시에 이름난 최익현(崔益鉉)·유중교(柳重敎) 등 여러 홍유(鴻儒)들과 교유하여 더욱 학문을 익혔다. 1895년에 을미사변이 일어나 안팎으로 일인의 세력이 발호하자,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능주향교(綾州鄕校)까지 달려갔다.
그러나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향리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근기(近畿) 일원에서 이단을 배척하고 정학(正學)을 지키려는 위정척사학파의 일원으로 태서(泰西)의 학을 극력 배척하였고, 또 일본 등 열강의 외세에 대항하여 이를 물리쳐서 국기를 바로잡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는 주리(主理)·주기(主氣) 어느 일방에 치우침을 경계하고, 이와 기는 하나로 합해진 일물(一物)로 해석하였다. 저서로는 『사복재집(思復齋集)』 6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