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릉은 북한 경기도 개성특급시 령남면 룡흥리 화곡동에 있는 고려 전기 제2대 혜종과 왕비 의화왕후 임씨가 묻힌 왕릉이다. 순릉은 화곡동에 있다 하여 화곡릉으로 불리며 북한 보존급유적 제946호로 지정되었다. 능역은 고려왕릉 중 가장 작고 12각 난간석 잔편만 알려졌다. 2019년 발굴로 능역과 3단의 능제가 알려졌다. 1단에는 봉분과 난간석 및 1867년에 세운 비석을, 2단에서 좌우 1기씩의 문석인상을, 3단에서 정자각 터와 주춧돌을 발굴하였다. 내부의 널칸에서 왕과 왕후의 관대 및 부장된 청자나 기와류까지 발굴하였다.
태조의 장남인 혜종(惠宗)은 943년(혜종 즉위년) 고려 제2대 임금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945년(혜종 2) 9월 무신일에 병으로 중광전(重光殿)에서 승하하여 송악산(松嶽山) 동쪽 기슭에 장례를 지냈고, 능호(陵號)는 순릉(順陵)이다. 이후 혜종의 제1왕비인 의화왕후(義和王后) 임씨가 승하하자 순릉에 합장되었다. 혜종의 얼굴에는 곰보자국이 있어 ‘추왕’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의 무덤을 ‘추왕릉’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순릉 앞에는 조선시대인 1867년(고종 4)에 75기의 고려왕릉을 보수하고 정비하며 세운 ‘고려혜종릉(高麗惠宗陵)’이라는 표석(表石)이 서 있었다. 현지 주민들은 황해북도 개풍군 화곡동에 위치한 왕릉이라 하여 지역 명칭을 붙여 ‘화곡릉’이라거나, 근처가 마전동이어서 ‘마전릉’이라거나, 말구리 고개에 위치한다 하여 ‘말구리릉’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순릉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발굴되었는데 “봉분에 병풍석(屛風石)이 없고 난간석의 잔석(殘石)이 남아 있으며, 다른 석물은 없다. 능 앞에 정자각(丁字閣)의 초석(礎石)이 남아 있다.”라는 보고서가 남아 있다. 그러나 1963년의 현지 조사를 통해 봉분을 둘러싼 병풍석은 뒷산과 봉토에서 흘러내린 흙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 흙에 묻히거나 끊어져 한 개도 완벽하지 않고 난간 석주나 동자(童子) 석주의 잔편 12개가 남아 있고, 그 높이는 대체로 40㎝ 정도이다. 그 밖에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및 석수(石獸) 등이 없었고 능역을 돌아가면서 돌담을 쌓았던 흔적은 남아 있다. 2단의 석축 높이는 1m이고, 2단과 3단의 석축 간격은 7m이다. 4단의 정자각터 동쪽 옆에는 9개의 초석이 남아 있고, 그 정면 경사면에는 돌계단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북한의 보존급 유적 제946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8년까지 순릉의 보존 및 보호 구역은 2,850㎡ 정도로 고려왕릉 중 가장 작았다. 능은 경사면에 4단으로 축조되었고 1단 중앙에 있는 직경 11m의 봉분은 지면으로부터 높이 약 330㎝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2019년 북한의 민족유산보호국 산하 조선민족유산보존사와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주도로 순릉을 대대적으로 발굴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었다. 그 결과 순릉은 능역 전체에 돌담[曲墻]을 쌓았던 흔적이 있는데 이를 통해 남북 6,360cm, 동서 20m 범위로 고려왕릉 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능역은 3단으로 구분된 것이 확인되었다. 1단에는 중앙에 직경 13m 규모의 봉분과 둥근 화강석을 다듬은 원형 기단이 있을 뿐 병풍석은 없고, 그 주위를 두른 난간석의 일부를 발굴하였다. 봉분 앞에서는 1867년(고종 4)에 세운 '고려왕릉(高麗王陵)'이라고 새긴 비석이 반으로 절단된 상태인 것을 발굴하였다. 2단의 좌우에서는 진현관(進賢冠)을 쓰고 홀을 든 환조형(丸彫形)의 고려 전기 왕릉 양식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문석인상(文石人像) 각각 1기씩을 땅 속에서 찾아냈다. 3단에서는 제례(祭禮)를 드렸던 정자각 터를 확인했고 많은 주춧돌을 발견하였다. 왕릉 내부의 널칸[玄室]은 길이 4m, 너비 340cm, 높이 220cm로 지금까지 발굴된 고려왕릉 중 가장 규모가 컸다. 묘실(墓室) 안 중앙에는 합장된 왕과 왕후의 관대(棺臺)가 마련되어 있고 그 옆에 부장대(副葬臺)가 마련되어 있다. 여기에서 ‘청자 새김무늬 잔 받침대’, ‘잔 받침대’, ‘꽃잎무늬 막새기와’, ‘용모양 치미’ 등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고려 제1대 태조와 제1비인 신혜왕후(神惠王后) 류씨(柳氏)의 합장릉인 현릉(顯陵)은 943년 조성된 이후 외침이 있을 때마다 몇 차례 천릉(遷陵)과 복릉(復陵)을 하면서 후대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이에 비해 혜종 순릉은 946년(정종 1) 조성된 가장 이른 시기의 고려 초기 왕릉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특히 2019년 발굴을 통해 그동안 화곡릉으로 알려져 있던 순릉의 존재를 확정하고, 능역의 규모나 3단의 능제(陵制) 및 널칸의 구조, 상설의 종류와 양식까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도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