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는 국도인 상경을 중심으로 하여 각 방면에 이르는 교통로를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는 신라로 가는 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발해와 신라는 이하(泥河 : 현재의 용흥강)를 경계로 인접하여 있었고, 또 『삼국사기』에 인용된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의하면 책성부(柵城府 : 즉 동경용원부)와 신라의 천장군(泉井郡 : 현재의 德源) 사이는 39역(驛)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 사이에 남경남해부가 있었다. 따라서, 신라도는 상경에서 동경을 거쳐 남경에 이른 다음 신라로 들어가는 경로를 지칭하였다.
신라도를 통하여 발해와 신라가 접촉하였던 구체적인 사실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두 번에 걸친 신라의 사신파견 기록, 『거란국지(契丹國志)』에 보이는 발해가 신라와 결원(結援)하려 하였다는 기록, 일본기록에 보이는 당나라 사신 한조채(韓朝彩)가 발해에서 직접 신라로 갔다는 기록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교통로는 발해와 신라만을 잇는 구실만 한 것이 아니고 때로는 발해 사신이 일본으로 가는 경로로도 사용하였다. 즉,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의하면 777년 1월에 발해 사신이 남해부의 토호포(吐號蒲)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향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