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곳의 군사적 요충지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주례(周禮)』의 주에 사진을 산 가운데 중대한 것이라 풀이했고, 중국역대왕조의 사전(祀典)에 사진이 사방의 산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따르기 어렵다.
신라는 일찍부터 산악을 신성시해 국가적 차원에서 제사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그런데 삼국통일 이후 상당수의 명산대천을 새로운 영토로 편입하게 되었다.
이에 영토 확인, 민심 수습, 국가통치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국가제사의 대상을 전국의 명산대천으로 확대 재조정해야 하고, 나아가서 신기(神祇)체계와 국가제사제도를 재정비해야 하였다.
이에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해 명산대천을 중심으로 한 국가제사를 대사(大祀) · 중사(中祀) · 소사(小祀)로 등급화하였다. 또한 국토 사변의 산악을 사진으로 지정해 중사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동진(東鎭)은 아곡정(牙谷亭 : 지금의 蔚山으로 추정됨)의 온매근(溫沬懃), 남진은 추화군(推火郡 : 지금의 密陽)의 해치야리(海耻也里, 일명 悉帝), 서진은 마시산군(馬尸山郡 : 지금의 德山)의 가야갑악(加耶岬岳), 북진은 비열홀주(比列忽州 : 지금의 安邊)의 웅곡악(熊谷岳)이었다.
신라에서는 산에는 산신이 있고, 산신이 풍우를 조절하고 국토를 수호한다고 믿었다. 그것을 미루어 볼 때, 사진에 대한 제사는 곧 사진의 산신에 대한 제사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서진 가야갑악이라고 추측되는 가야산(伽耶山)이 덕산현의 서쪽 41리에, 가야갑악을 제사하던 가야갑사(伽耶岬祠)가 덕산현의 서쪽 3리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양자의 거리로 미루어 사진에 대한 의례는 제사대상을 멀리서 바라보고 제사하는 망사(望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