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헌(崔忠獻)의 심복으로서 최씨독재체제를 구축하는 데 보좌역할을 하였다. 희종(熙宗) 때 지유(指諭), 고종(高宗) 때 장군·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승선(承宣)을 역임하였다. 1211년(희종 7) 왕이 환관(宦官)·승려와 모의하여 최충헌을 죽이려 하자, 기윤위(奇允偉)와 함께 궁궐 안에서 승려들과 격투하여 최충헌을 보호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216년(고종 3) 거란유종(契丹遺種)이 침입하자 장군으로 김양여(金陽與) 등과 함께 개경을 방비하였는데, 이듬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쫓겨났다. 그러다가 1218년 조충(趙冲)이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 김취려(金就礪)가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방비할 때 우군으로 참전하여 거란족을 강동성(江東城)으로 몰아넣었다.
1220년 최충헌이 죽은 뒤 아들 최우(崔瑀)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며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책으로 최충헌이 점탈한 전민(田民)을 그 주인에게 돌려줄 때, 최충헌의 세력을 믿고 횡포를 자행하던 무리들과 함께 섬으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