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령(高靈). 전라남도 고흥 출생. 아버지는 고흥군수와 경찰서장을 지낸 신지우이다.
안과전문의로서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병리학과 약리학을 전공하여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 같은 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하여 경영진단사 자격을 받았다. 우리 나라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40여 년간 헌신 봉사하였으며, 한센병 환자를 전문치료·보호하는 국내 유일의 국립병원인 국립소록도병원에서만 17년간 근무하였다.
신체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의사가 되어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기로 뜻을 세웠다. 1947년 세브란스의전(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같은 해부터 광주의과대학 교수 조무원으로 3년간 근무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의 제3병원에서 군의관(육군중위)으로 근무하다 신체장애자라는 이유로 군복을 벗고 낙향하여 지내던 중 당시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시설기관인 소록도갱생원 김상태 원장의 권유로 한센병 환자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한센병 사업의 선구자인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목사로부터 ‘의사 일을 바로 하려면 불우한 주변에 눈을 돌려야 한다.’라고 강조한 말에 감명을 받아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한센병 환자들을 돕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57년 광주에서 17년간 개인의원을 운영하면서도 대한나관리협회 부회장과 전남지부장을 역임하는 등 꾸준히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봉사를 해왔다.
1974년 소록도에 원장이 공석이 되자 다시 한센병 환자들과 지내기 위해 소록도병원 근무를 자청하였으며, 한센병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계속해 나갔다. 한센병을 천형이라 여기는 것은 병의 흔적이 몸에 남기 때문일 뿐, 단순한 전염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기 때문에 한센병의 후유증으로 인한 장애를 예방하기 위해 정형수술을 실시한 후 물리치료와 의족 착용 등 보장구 제작 기술을 도입하였다.
환자들의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병동을 신축하고, 환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회도 설립하였다. 또, 자립기반 기금 마련을 위해 유실수 단지를 조성하고 축산 등을 장려하여 환자 복지증진에 공헌하였다.
한편, 소록도에 있는 동안 한센병에 관한 자료를 방대하게 수집하였다. 신문 축쇄판이나 마이크로필름은 물론, 조선왕조실록에서 한센병에 관한 내용을 조사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1985년 정년퇴직 후에도 전국 한센병 환자 병원과 정착농원을 돌며 진료활동을 계속하였다. 1994년 그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살던 집은 3남 1녀가 마련해 준 광주의 14평짜리 임대아파트가 전부였을 정도로 청빈하게 살아왔다.
1979년 홍조근정훈장, 1984년 광주 무등문화상(공공봉사부문), 1990년 인도주의실천의사상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는 『韓國의 癩』·『癩에 관한 자료집』·『소록도 일기』·『金敎臣과 문둥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