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3년(태조 2)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감무(監務) 송거중(宋居中)이 창건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0년에 군수 정호관(鄭好寬)이 중수하였다. 1623년에는 군수 성태기(成台耆)가 명륜당과 동재(東齋)·서재(西齋)·전사방(典祀房) 등을 설립하였는데, 그 규모가 웅장하고 수려하여 보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서재·전사방 등이 있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과 동무·서무에 우리 나라 18현(十八賢) 및 중국 94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 향교에는 미담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유생 임대해(任大海)가 문묘에 모신 위패를 지고 산성으로 피난하였다가 평정이 된 다음 다시 내려와 봉안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임대해의 아들 현(顯)이, 병자호란 때에는 손자 진한(振漢)·흥한(興漢)이 그렇게 하여, ‘삼세호성(三世護聖)’으로 유명한 일화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제기(祭器)와 전답을 바쳐 향교에 온 정성을 다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여 왔다. 광복 이후의 사항은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