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519년(중종 14)에 형조좌랑 이명(李洺)이 건립한 양반주택의 별당형 정자이다.
정자의 평면은 丁자 모양이며, 서쪽으로 1칸 크기의 온돌방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두 개 연이어 있다. 다음 1칸 크기의 마루방을 두고 그 북쪽으로 1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일렬로 늘어선 방과 마루에 연이어 동쪽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큰 대청을 두었다.
방과 대청 주위로 툇마루를 두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막돌허튼층쌓기를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주두를 얹었다. 주두 위에는 밑면이 초각(草刻)된 첨차를 놓고 소로들을 얹어 굴도리 밑의 장여를 받쳤다. 보방향으로는 쇠서 하나를 내밀어 초익공(初翼工) 구조를 이루고 있다. 기둥 사이에는 창방 위에 화반을 두고 소로를 얹어 굴도리의 장여를 받치게 되어 있다.
가구는 오량(五樑)으로 앞뒤의 평주(平柱)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의 동자기둥에 첨차와 소로를 짜넣어 종보와 중도리를 받치고 있으며, 종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대청바닥은 우물마루로 마루 밑이 사방으로 터진 누마루식이다.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나 합각머리 아래만은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대청 서쪽의 온돌방과 마루 쪽에는 방주(方柱)를 세운 굴도리집으로 간결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처마도 대청 쪽은 부연을 단 겹처마로서 팔작지붕을 이루나 서쪽 방 쪽에는 홑처마로서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 정자의 동쪽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고, 연못 가운데의 둥글게 다듬은 돌에 의도적으로 구멍을 세 개 뚫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정자의 몸채는 정자 서쪽에 있는데 정승이 세 사람이나 탄생하였다는 영실(靈室)이 있고, 그 평면은 양택론에서 길형으로 말하는 用자형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