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 25장의 필사본이다. 표제는 ‘경상남도안의군읍지(慶尙南道安義郡邑誌)’이고, 권수제는 ‘안의읍지(安義邑誌)’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책의 첫머리에 채색 지도 1장을 첨부하였으며, 그 다음에 목록(目錄)을 제시하였다. 수록 항목은 건치연혁(建置沿革), 현명(縣名), 관직(官職), 성씨(姓氏), 산천, 풍속(風俗), 방리(坊里), 성지(城池), 임수(林藪), 호구(戶口), 결총(結總), 군액(軍額), 창고(倉庫), 군기(軍器), 조적(糶糴), 학교, 서책(書冊), 단묘(壇廟), 공해(公廨), 누정(樓亭), 불우(佛宇), 도로, 교량(橋梁), 도서(島嶼), 제언(堤堰), 장시(場市), 역원(驛院), 형승(形勝), 고적(古蹟), 토산(土産), 진공(進貢), 봉름(俸廩), 인물, 과거(科擧), 읍선생(邑先生) 등으로 구성하였다.
건치연혁 항목에 따르면, 경상남도 안의군(安義郡) 지금의 [함양군 안의면 일대]은 신라 때 마리현(馬利縣)으로 불리다가 경덕왕 때 이안현(利安縣)으로 개칭되어 천령군(天嶺郡)에 속하였다. 고려 현종 때에는 합천(陜川)에 소속되었으며, 공양왕 때 감음(感陰)에 이속되었다. 감응현(感應縣)은 신라 남내현(南內縣)이었으나 경덕왕이 여선(餘善)으로 고쳐 거창군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전기에 감음으로 다시 바뀌었다. 고려 의종 때 지역 인물 자화(子和)가 무고를 당하여 감음현이 부곡(部曲)으로 강등되었다가, 공양왕 때 감무가 설치되며 이안현이 되었다. 조선 태종 때는 안음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현감이 파견되었다. 영조 때 정희량(鄭希亮)의 반란으로 안음현이 폐지되었으나, 선비 이성택(李聖擇)의 상소로 다시 설치되었다. 1767년(영조 43) 산음현에서 산청으로 개칭되며 안음현도 안의현(安義縣)으로 바뀌었다.
산천 항목에서는 덕유산(德裕山) 등 안의군의 산과 봉우리, 하천의 위치 정보를 소개하였다. 풍속 항목에서 처음에는 “사나우며 다툰다”고 기록하였으나, 신증 항목으로 정여창(鄭汝昌)의 부임 후 제현(諸賢)이 배출되면서 풍속이 크게 변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방리 항목에는 현내면(縣內面)과 황곡면(黃谷面) 등 12개 면과, 관아를 기준으로 한 해당 면의 위치와 그에 속한 마을의 수를 기재하였다. 성지 항목에는 황석산성(黃石山城) · 육십현고성(六十峴古城) · 소흘고성(所屹古城) · 말흘고성(末屹古城) · 장풍고성(長風古城) · 용문고성(龍門古城) · 호음고성(虎陰古城) 등 이전 시기에 안의 지역에 존재하였던 성의 위치와 전해 오는 이야기들을 기록하였다.
호구 항목에는 1899년[기해년]을 기준으로 호구 수 3,791호에 남자 6,994명, 여자 5,588명임을 적어 놓았다. 이전 자료인 1831년(순조 31)의 수치도 함께 기록하였는데, 호구 수 4,565호에 남자 8,555명, 여자 1만 756명이라 하였다. 군액 항목에서는 안의군 내 각 군병의 소속별 인원수를 밝혔다. 창고 항목에는 군기고와 대동고 등 군내 8개의 창고를 기재하였고, 조적 항목에는 해마다 가감이 있다고 하여 정확한 내역은 적지 않았다. 군기 항목에는 안의군이 비축하였던 각종 무기의 종류만 나열하였다.
학교 항목에는 향교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적었다. 서책 항목에는 『주역구해(周易具解)』, 『시전구해(詩傳具解)』 등 군이 소장하고 있는 각종 도서 목록과 권수를 기재하였다. 이외에 단묘, 공해, 누정, 도로, 교량, 제언, 장시, 역원 등은 모두 군내의 해당 시설을 기록한 항목들이다. 형승 항목에는 화림동(花林洞)과 제월대(霽月臺), 풍류암(風流巖) 등 안의군의 이름난 풍경을 기재하였으며, 고적 항목에는 감음구기(感陰舊基), 갈산(乫山) 등을 기록하였다. 토산 항목에는 호두와 오미자, 은어, 꿀, 감, 사향, 백화사(白花蛇), 석이버섯, 대나무, 웅담, 당귀 등을 써넣었다. 진공 항목에서는 조홍시자(早紅柹子)와 준시(蹲柹), 곶감, 청대죽(靑大竹) 등을 소개하였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안의군의 사회경제적 변화상을 파악하는 기초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