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길보(吉甫), 호는 낙애(洛厓). 아버지는 안한소(安漢召)이다. 17세때 김태기(金泰基)에게 수업했으며, 1690년(숙종 16) 사마시에 합격했다. 이듬해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하여 참형(慘刑)을 당한 박태보(朴泰輔)를 신원(伸寃)하려 했으나, 성균관의 모든 유생들이 동조하지 않으므로 좌절되고 말았다. 1694년(숙종 20) 문묘에서 출향(黜享)된 이이(李珥)·성혼(成渾) 등이 복향(復享)되므로 인하여 이의 처사가 부당하다는 반대 상소에 소수(疏首)가 되었다.
삼조선왕(三朝先王: 인조·효종·현종)의 성지(聖旨)와 선유(先儒)의 정론(正論)을 어겼으며, 또한 한(漢)의 양웅(楊雄)·마융(馬融)·위(魏)의 왕숙(王肅)·송(宋)의 왕안석(王安石) 등도 문묘에서 출향되었다가 복향되지 않았음을 전례(前例)로 들어 극력 반대했으나, 그 상소는 윤허되지 않고 함경도 부령(富寧)에 유배되었다.
배소(配所)에 먼저 유배된 배정휘(裵正徽)를 만나 경학(經學)·『장자(莊子)』·『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및 역사 등을 서로 강론하면서 학문 연구에 주력하다가 이듬 해인 1695년(숙종 21) 풀려나왔다.
1717년 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의 하교가 있자 안동(安東)·상주(尙州) 등의 과거시험장에 달려가서 과거 보려고 모인 유생들에게 세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상소하기를 역설했다. 이로 인하여 조야가 숙연해짐과 동시에 선비의 사기(士氣)를 진작케 했다. 저서로는 『낙애문집(洛厓文集)』 6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