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남북국시대 발해의 정당성좌윤, 위군대장군상진장군 등을 역임한 관리. 외교가.
개설
생애와 활동사항
일본 조정에서는 발해 사신을 수도에 들일지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마침내 허락이 되어 872년 5월에 일행 중 20명만 수도에 들어가 홍려관(鴻驢館)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직접 일본 왕을 알현하지 못하고 관리를 통하여 국서(國書), 중대성첩(中臺省牒) 및 선물만 바쳤다. 이에 일본 왕은 양성규에게 종3위(從三位)를 내렸고 나머지 일행에게도 차등 있게 위계를 주었다.
한편 양성규 일행은 진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가서 일본의 허락을 받아 사무역(私貿易)을 행하기도 하였는데, 첫째 날은 일본 내장료(內藏寮)와 관청 간의 무역을 행하고, 둘째 날은 경사인(京師人)과 교역을 하고, 셋째 날은 시장 상인들과 교역하였다. 또 양성규는 문장에 뛰어났기 때문에 일본 왕은 문인인 고세노 후미오(巨勢文雄).후지와라 노스케요(藤原佐世).미야코노 요시카(都良香) 등의 문인을 보내 접대하도록 하여 문학적 교유를 하도록 하였다. 5월 말에 일본 왕이 발해왕에게 보내는 답서와 태정관(太政官)이 발해 중대성에 보내는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참고문헌
- 『삼대실록(三代實錄)』
- 『유취국사(類聚國史)』
- 『도씨문집(都氏文集)』
-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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