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군 ()

대동여지도 중 강원도 양양 부분
대동여지도 중 강원도 양양 부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강원특별자치도의 중앙에 위치한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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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강원특별자치도의 중앙에 위치한 군.
개관

영서의 인제군, 홍천군 등과 함께 강원도의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동경 128°22'∼128°55', 북위 37°51'∼38°10'에 위치해 있다. 면적은 629.86㎢이고, 인구는 2만 7479명(2008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5개 면, 124개 행정리(120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에 있다.

자연환경

동으로는 약 40㎞에 걸쳐 동해에 연하고, 서로는 태백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 영동과 영서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다. 태백산맥의 주봉인 설악산(대청봉)은 표고가 1,708m에 달하며, 점봉산(1,424m), 응복산(1,359m) 등 험준한 산들이 많이 솟아 있어 산과 바다의 자연요소를 갖추고 있는 관광개발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또한 양양지역의 암석분포를 보면 해안은 대부분 해안화강암이고, 태백산맥에 접한 산간지대는 화강암과 편마암으로 구성조직되었고, 서면 장승리 일대에는 흑운모화강암, 흑운모 편마암, 섬장암, 거정 화강암이 분포되어 있다.

하천은 대개 수계가 짧고 급류를 이루며 수량은 적은 편이다. 이들 하천 중 큰 것은 남대천(南大川)으로 오대산 동쪽의 두로봉(頭老峰, 1,421m) 기슭에서 발원하였다. 북쪽으로 흐르면서 현북면의 법수치리를 지나 어성전리에 이르러 유역에 약간의 곡저평야를 이루고, 계속 북쪽으로 흘러 서면 북평리에서 서림천(西林川)을 합류하고 동북쪽으로 흐르면서 유역에 비교적 넓은 충적지를 형성하면서 동해로 흘러든다.

구룡령(九龍嶺)에서 발원한 서림천은 북쪽으로 흐르면서 서면의 갈천리 · 영덕리를 지나 공수전리에서 동북쪽으로 꺾여 상평리에 이르러 오색천(五色川)을 합류하고 북평리에서 남대천에 합류된다.

대청봉에서 발원한 물치천(沕淄川)은 강현면을 관통하면서 석교리 · 장산리 · 강선리에 이르는 비교적 넓은 평야를 형성하고 물치리에 이르러 동해로 흘러든다. 한계령(寒溪嶺)에서 발원한 오색천은 동쪽으로 흘러 서면 상평리에서 서림천에 합류한다.

평지는 해안을 따라 2∼4㎞ 너비로 길게 발달되어 있다. 해안선은 40.3㎞에 이르나 매우 단조롭고, 곳곳에 사빈(모래가 깔린 바닷가의 땅) · 사취(바다 가운데로 길게 뻗어 나간 둑 모양의 모래톱) 및 매호(梅湖) · 쌍호(雙湖) 등 석호(潟湖)가 발달하였다. 현남면 인구리에는 육계도(陸繫島)인 죽도(竹島)가 있다.

암석해안은 해식애를 이루며 부근의 사빈과 어우러져 좋은 관광 · 휴양지로 이용되고 있다. 한편, 물치 · 인구 · 남애(南涯) 등지에 작은 만입이 있어 어항 · 난항으로 쓰이고 있다. 연안의 조석간만의 차는 20㎝에 불과하고, 바다는 해안에서 불과 500m 정도의 거리에서 수심 수백m의 심해가 된다.

양양지방은 태백산맥의 급경사이면서 동해와 접하는 해안에 위치하여 해양성 기후에 가까운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연평균 기온이 12℃내외로 군산, 남원, 영천등 북위 36도 부근의 영호남지방과 같고, 연교차는 34℃이하로 목포, 여수, 부산 등 북위 35℃부근의 남해안 지방과 같아 위도에 비하여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편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300㎜ 내외로 우리나라 북동부 다우지역에 속하며, 가을철 강수량이 350㎜, 겨울철 강수량이 150㎜ 이상으로 늦장마와 폭설이 자주 나타나며, 또한 연평균 풍속은 2.9㎧, 폭풍일수는 10일 이상으로 겨울과 봄에 서풍계열의 바람이 강하고, 순간최대풍속 46.0m/s(1980년 4월 19일)는 도내 최고 기록이다. 한편으로 지속적인 서풍계열의 바람이 불 때는 팬 현상이 나타나고, 특히 북동류가 유입될 때는 계절에 관계없이 날씨의 변화가 급격하여 기상재해의 우려가 높다.

역사

이곳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발견된 예는 없다. 손양면 오산리에서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 서기전 6000여 년까지 소급되는, 신석기유적지가 발굴되어 이곳에서의 구석기유물 · 유적 발견 가능성이 있다.

오산리유적 발굴조사에서는 그 때까지 시기의 선후관계가 확실하지 않던 뾰족바닥토기[尖底土器]와 납작바닥토기[平底土器]가 층위를 이루면서 나타나, 납작바닥토기가 뾰족바닥토기에 선행했음이 밝혀져서 학계의 관심을 주목시켰다.

이 밖에도 손양면 금강리와 서면 범부리에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남아 있다. 그리고 손양면 가평리에 민무늬토기와 김해식토기가 함께 반출되고 있는 초기철기시대의 주거지가 발견되어 이 지역이 선사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예국(濊國)에 속했는데, 고구려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익현현(翼峴縣) 또는 이문현(伊文縣)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뒤 신라가 고구려를 멸하고 그 땅에 한주(漢州) · 삭주(朔州) · 명주(溟州)의 3주를 설치하자, 이곳은 명주 수성군(守城郡 : 지금의 고성군)의 관할을 받는 익령현(翼嶺縣)으로 바뀌었다.

이곳에는 빼어난 자연경관과 함께 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676년(문무왕 16)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관음대성의 계시에 의해 창건했다는 낙산사(洛山寺)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벼 베던 여인이나 빨래하던 여인과의 일화를 남긴 곳도 이곳이다.

성종 때 10도제가 실시되면서 익령현은 삭방도(朔方道)에 속하게 되었다. 현종 때 지방제도가 5도양계로 고쳐진 뒤에는 동계(東界)에 속해 1018년(현종 9) 현령이 파견됨과 동시에 동산현(洞山縣)이 내속(來屬)되었다.

1221년(고종 8) 몽고병을 격퇴시킨 공으로 양주(襄州)로 승격되고 방어사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1257년 적에게 항복한 사건으로 덕녕현(德寧縣)으로 격하되어 감무가 임명되었다. 1260년(원종 1) 다시 양주로 회복되었고, 고려 말에는 안축(安軸)이 양양향교를 세웠다.

이곳은 태조의 외향(外鄕)이었던 까닭으로 1397년(태조 6) 부(府)로 승격된 데 이어 1413년(태종 13) 도호부가 되었으며, 1416년양양(襄陽)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당시 강원도를 대표하던 강릉과 원주가 정치적 · 사회적 사건으로 일시 격하될 때에는 도의 이름을 원주와 양양의 머리글자를 딴 ‘원양도’, 또는 강릉과 양양의 머리글자를 딴 ‘강양도’로 바뀔 정도로 도를 대표할 만한 위치로까지 부각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조선 초기 양양의 호구는 857호 1,277인, 동산현은 125호 218인으로 같은 강원도내의 삼척도호부나 춘천도호부보다 현격히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양은 도를 대표하는 곳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 뒤 1618년(광해군 10)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23년(인조 1) 다시 부로 승격되는 등 몇 차례의 변동을 겪기도 하였다.

1895년 지방관제가 바뀌어 전국이 23부로 편성되면서 강릉부 관할 양양군으로 편제되었다. 1896년 다시 지방관제가 개편되어 전국이 13도로 나뉘자 강원도 관할 양양군이 되었다. 『양양읍지(襄陽邑誌)』에 의하면, 1901년 당시 이 군은 12개 면 67개 이를 관할했고, 총 2,777호 6,786명의 인구를 관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1919년 5월 15일에는 간성군이 고성군으로 바뀌면서 그 관할 하에 있던 토성면(土城面)과 죽왕면(竹旺面)이 양양군으로 편입되었다. 3 · 1운동 당시 격렬한 시위를 벌였던 현북면 기사문리의 고개는 지금도 만세고개라 불리며, 양양읍 군향리현산공원에는 3 · 1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45년 광복되면서 현남면 · 현북면과 서면의 일부가 강릉군에 편입되었다. 이 군은 38선상에 위치해 6 · 25 때 북한이 이곳을 동해전선의 교두보로 삼음으로써 남북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따라서 극심한 전화를 입었다. 1946년에 조직된 양양자치방위특공대가 북한군 패잔병 200여명을 소탕한 사실은 기억될 만한 것이다.

1954년 10월 21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현남면은 명주군에, 현북면과 서면은 양양군에 복귀되었다. 1963년 1월 1일에는 속초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분리되어 나가고, 죽왕면 · 토성면이 고성군에, 명주군 현남면이 양양군으로 환원되었다.

1973년 7월 1일서면의 명개리가 홍천군 내면에, 손양면 상왕도리의 일부가 양양면 월리에 편입되었으며, 1979년 5월 1일에는 양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강현면 상복리 일부가 속초시로 편입되었고, 1989년 1월 1일손양면 가평리와 송현리 일부가 양양읍 송암리에 편입되었다.

1992년 11월 23일 양양군 조례 제1399호에 의거 양양읍 구교리(舊校里)가 구교1리(舊校1里)와 구교2리(舊校2里)로 분할되었고, 강현면 전진1리(前津1里)가 전진1리와 주청리(酒聽里)로 분할되었으며, 1996년 1월 9일 양양군 조례 제1516호에 의거 서면 장승2리(長承2里)에 장승3리(長承3里)가 편입되었다. 1997년 12월 15일 양양군 조례 1614호에 의거 현남면에 신진리(新津里)가 신설되었다. 1999년 1월 9일 양양군 조례 1635호에 의거 현남면 신진리가 인구1리(仁邱1里) · 두창시변리(斗昌市邊理)에 편입되어 현재 1개읍 5개면 124개 리로 되어있다.

유물 · 유적

양양군 문화유산은 국가지정유산 14개, 강원도지정유산 18개가 있다. 국가지정유산으로는 국보 1개, 보물 8개, 사적 및 명승 3곳, 천연기념물 2개가 있고, 강원도지정유산으로는 유형문화유산 8개, 기념물 3개, 문화유산자료 7개가 있다.

선사유적으로는 손양면의 양양오산리선사유적(강원도 기념물, 1990년 지정)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토기와 석기가 있다. 이곳에는 양양오산리 선사박물관이 세워져 있어 선사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고 있다. 서면에 범부리지석묘군이 있다. 손양면 가평리에는 초기철기시대의 주거지가 있고, 이 유적에서 민무늬토기 · 김해식토기 · 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현남면 포매리의 신라고분군에서는 토기류가 발굴되었다.

현북면 하광정리에 초진산봉수대, 현남면 남애리에 양이산봉수대 등이 있다.

불교 유산으로는 강현면 둔전리의 양양진전사지(강원도 기념물, 1982년 지정) · 진전사지삼층석탑(국보, 1966년 지정) · 진전사지부도(보물, 1966년 지정), 서면 서림리의 양양선림원지(강원도 기념물, 1982년 지정) 등이 있다.

이 밖에 선림원지삼층석탑(보물, 1966년 지정) · 선림원지석등(보물, 1966년 지정) · 선림원지홍각선사탑비(보물, 1966년 지정) · 선림원지부도(보물, 1966년 지정) · 1996년 강원도 문화재 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양양서림사지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이 있다.

또한, 서면의 양양 오색리 삼층석탑(보물, 1968년 지정), 강현면 전진리 낙산사 · 낙산사 칠층석탑(보물, 1968년 지정) · 낙산사동종(보물, 1968년 지정) · 낙산사 홍예문 · 의상대 · 양양 낙산사 사리탑 등이 있다. 강현면 전진리 낙산사, 낙산사 홍예문은 1971년, 의상대는 1974년, 양양 낙산사 사리탑은 1982년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외에 낙산사 담장(강원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 낙산사 홍련암(강원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현북면 어성전리의 양양 명주사 동종(강원도 유형문화재, 1980년 지정) · 양양 명주사 부도군(강원도 문화재자료, 1991년 지정) 등이 있다.

이 밖에 사찰로는 양양읍 화일리의 영혈사(靈穴寺), 현북면 어성전리의 명주사, 현남면 인구리죽도의 죽도암(竹島庵), 후포매리의 매월사(梅月寺) 등이 있다.

유교 유산으로는 양양읍 임천리에 양양향교(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가 있다.

건축 유산으로는 현남면 시변리의 양양 김택준 가옥(강원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전포매리의 양양 조규승 가옥(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북분리의 양양 김성래 가옥(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서면 서선리의 양양 이두형 가옥(강원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등이 있다.

이 밖에 양양읍의 양양읍성, 화일리의 영혈사(靈穴寺) 요사채, 현북면 하광정리의 하조대(河趙臺), 강현면 전진리의 기우정(耆友亭)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현남면의 양양 포매리 백로와 왜가리 번식지(천연기념물, 1970년 지정)와 설악산 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1965년 지정) 등이 있다.

양양읍 군향리현산공원에는 6 · 25사변 때 북진중 일선에서 산화한 222위의 영령을 위로하는 충혼탑이 건립되어 있다.

교육 · 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1329년(충숙왕 16)에 안축(安軸)이 창건한 양양향교가 양양읍 임천리에 있다. 이 향교는 본래 구교리에 있었으나 1626년(인조 4)에 중수, 1682년(숙종 8)최상익(崔商翼)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해 문묘를 봉사하였다. 6 · 25사변으로 소실되었으나 1953년 지방유지들이 재건했고, 구내에 명륜학원을 설립하였다.

그 밖에 1628년에 설립된 양양읍 조산리의 동명서원(東溟書院)에서는 조인벽(趙仁璧)을 배향하였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06년양양읍 구교리의 현 양양초등학교 자리에 현산학교가 최초로 개교되었다. 이 학교는 양양중고등학교의 전신으로, 남궁 억이 군수로 있으면서 유학의 전통이 강해 신문물의 도입이 어려웠던 양양에서 직접 영어 · 음악 · 산수 · 역사 · 체조 등의 근대교육을 실시했으며, 3 · 1운동 당시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51년 양양중학교, 1953년 양양고등학교가 개교되었다. 이전의 명륜중학원이 1956년 정규 사립중학교로 승격되었으나 운영난으로 1971년 폐교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4개교, 중학교 5개교, 고등학교 2개교가 있고, 관동대학교 공과대학이 있다.

1971년 설립된 양양문화원이 지역 문화 활동을 주도하고 있으며, 1979년부터 매년 4월초 현산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가을에는 지역 특산품인 송이를 주제로 한 송이축제와 연어를 테마로 한 연어축제가 펼쳐진다. 공공도서관은 양양도서관이 있고, 문화공간은 공공공연장, 군민회관, 복지회관이 있다. 체육시설로는 실내체육관와 테니스장 등이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패다리놓기놀이’가 전한다. 이 놀이는 두 마을이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함께 힘을 모아서 어느 편이 신속하게 다리를 놓는가를 겨루는 놀이이다.

지형적으로 개울이 많으며, 마을과 마을이 서로 떨어져 있는 양양 지방에는 개울마다 수많은 다리가 놓여 있다. 그러므로 다리의 설치는 농로(農路)의 교통수단으로 큰 구실을 하는데, 이러한 자연여건 속에서 이 놀이가 발생한 것이다.

여름철 큰물이 나가고 난 뒤 추석을 전후해서 다리를 설치한다. 개울을 경계로 양지마을과 음지마을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다리를 반씩 나누어 서로 빨리 놓기 경쟁을 하여 합동으로 다리를 설치한다. 다리를 먼저 놓아 승리하게 되면 그 마을에는 풍년이 들고 번영이 온다고 믿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마을의 대동단결과 주민들의 화합을 이끌 수 있었다.

그 밖에 ‘귀애파기놀이’도 이 고장의 빼놓을 수 없는 민속놀이이다. 산속 깊은 곳에 농경지를 두고 있는 이곳 농민들은 물을 다스리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개발해 왔다. 농사에 있어서 물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고, 특히 산골짜기의 다락골 논에 물을 댄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물을 대기 위해 산골에서는 큰 통나무의 속을 파서 수관(水管)이나 수로를 만들게 되었다. 이처럼 물이 흐르게 하기 위해 속을 파낸 통나무수로를 ‘귀애’라 한다. 이 귀애를 만드는 일은 마을의 큰 행사였다.

매년 한식을 전후해 온 마을사람들이 한데 모여 귀애를 파고 이를 산골의 논에 설치한다. 이 때 하늘에 제를 올려 풍년을 기원하며 마을 농악에 맞추어 한바탕 흥겹게 노는데, 그래야만 가뭄이 없고 풍년이 든다고 한다.

이 고장의 동제로는 각 마을 단위로 행하는 서낭제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현산서낭제가 크게 돋보인다. 현산서낭제는 임진왜란 후 매년 5월 5일 단오에 장군서낭신을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서낭굿을 성대하게 치렀다고 한다.

그 뒤 일제강점기에 폐지되었으나, 1968년 군민들의 노력으로 서낭당이 다시 건립되어 서낭제가 부활되었다. 제의는 이 지방의 3 · 1운동기념일인 4월 4일로 변경하여 지내다가 현재는 다시 단오 무렵으로 바꾸어 현산문화제 속에 포함시켜 거행하고 있다. 이 서낭제는 향토축제의 성격과 풍농 · 풍어제의 성격을 겸하고 있다.

설화 · 민요

이 군에는 명승지가 많고 또 거기에 얽힌 전설도 많이 전한다. 현북면 하광정리 해변에 있는 하조대에는 두 가지 설화가 전한다. 하나는 조선왕조의 건립에 공을 세운 하륜(河崙)과 조준(趙浚) 두 사람의 성을 따서 명명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라 때 하씨 문중의 서라벌에 가서 화랑이 된 하랑(河朗)과 조씨 문중의 낭자 조당(趙棠) 사이의 이룰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 두 사람은 결국 하조대 절벽에서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말았는데, 그들의 넋이 해당화에 깃들여서인지 하조대 근처의 해당화는 동해안 다른 곳의 해당화보다 더욱 붉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는 비석에 관한 「구교리 선정비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 양양에 와서 부사로 있던 이상일은 어려운 백성을 잘 보살펴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고을 백성이 없었다. 임기가 끝나면서 돌아간 뒤 고을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그 뒤 백성들이 억울한 누명이나 관원들에게 억압을 당하면 이 선정비에 와서 눈물을 흘렸는데, 비석도 그 억울함을 동정해 함께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양양 제일의 역사(力士) 탁장사(卓壯士)에 대한 전설도 있다. 양양부사가 임금의 관(棺)을 만들 재목을 서면과 현북면에 하나씩 해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때 면 경계에 나무 한 그루를 베어 놓고 두 고을에서 시비가 벌어졌다.

결국, 두 고을에서 각기 힘센 사람을 골라 혼자 힘으로 지고 가는 고을에서 가지기로 하였다. 이 때 서면에 탁이라는 장사가 있어서 현북면에서는 엄두도 못 낸 재목을 거뜬히 지고 서면으로 걸어갔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일설에는 강릉시의 권장사와 힘을 겨루었다고도 한다.

그 밖에 원효대사가 강원도 땅에 와서 포교를 하기 위해 여기저기 터를 골라 절을 지을 때 먹을 물이 없어 샘물을 점지해 달라고 기도했다는 「영혈사전설(靈穴寺傳說)」, 산에 올라가 발을 구르면 마치 북 치듯이 쿵쿵 소리가 난다는 손양면의 「쿵쿵산전설」, 한 달에 두 번씩 끓어오르는 물이 있어 그것을 먹으면 힘이 세지고 장군이 된다는 「장군수전설(將軍水傳說)」 등이 있다.

이 고장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는 어업노동요와 비기능요인 타령류가 많다. 어업노동요로는 그물을 풀고 당길 때 부르는 노래가 중심이 되는데, 「그물 푸는 노래」는 “(앞) 에라소 가레이야 이번 가래는 누구인가/(뒤) 에라소 가레이야/(앞) 명사십리 해당화야 에라소 가레이야 ……”라고 하여 고기를 퍼담을 때 부르는 「가래소리」를 이용하고 있다.

그물을 당길 때는 “에이야 어거디야/에이야 에이야/어거갈싸 에이야/충신되어 에이야……/댕겼네 에이야”라고 한 장단씩 주고받으면서 박자를 맞추어 부른다. 만선으로 귀항할 때도 다같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물 당기는 노래」와 사설이나 뒷소리가 비슷하다.

「고기 푸는 노래」로는 「가래소리」가 불리는데 “에라소 가래소”라는 뒷소리 이외에도 “어야차 어야차”나 “자─자─자─자─”와 같이 작업 중에 저절로 나오는 소리를 사용하기도 한다.

농업노동요로는 「모찌기노래」 · 「모내기노래」가 일부 지역에서 불린다. 「모찌기노래」는 “얼른 하더니 또 한줌이다.”라고 돌아가면서 외치기도 하고, “가더니 또 한줌이 나간다 쪄라 부지런히 쪄라.”라고 가락을 넣어 부르기도 한다.

「모내기노래」로는 “심어주게 심어주게/원앙에 줄모를 심어주게……”등의 사설에다가 「아리랑」의 후렴을 사용하기도 하고, “오독떼기 추야월에/달도밝고 명랑하다……”라고 인근지방에서 「논매기노래」로 불리는 「오독떼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여성들의 노동요로는 구체적인 작업과 관련된 노래보다는 “여보시오 부인네님/세간살이 들어보소/나는데는 한군데요/쓰는데는 무궁하니/식구보고 양식보아/식량절약 위대하소……”와 같이 부녀자들의 태도와 사치경계 · 효행 등을 주제로 하여 훈계하는 음영민요가 많이 불린다.

그리고 “둥기 둥기 둥기요/둥기 둥기 둥기요/먹으나 굶으나 둥기요/입으나 벗으나 둥기요/둥기 둥기 둥기요/둥기하다 팔아프면……”과 같이 아이를 얼르는 「둥기요」, 사설은 비슷하나 “풀풀 풀미야”를 사용하는 「풀미요」가 많이 불린다.

비기능요로는 「정선아라리」와 「강원도아리랑」의 보편적인 사설들을 긴아라리나 자진아라리조로 모두 부르며, “우리댁 낭군은/날마다 엽전칠푼 걸머지고/함주원산 보령청진/길주명천 회령홍성 돈벌러 갔는데……”와 같이 민족항일기에 함경도로 돈벌러 떠나는 시대상을 담은 「엮음아리랑」도 불린다.

“슬슬 동풍이/궂은비 줄줄이 오는데……”와 같이 뒤에 「아리랑」이나 「사랑가」를 이어 붙여 길게 부르는 「동풍가」도 있다. 그 밖에도 「각설이타령」 · 「창부타령」 · 「산타령」 · 「미나리타령」 등 타령류의 노래와 「꼬리따기노래」 등의 동요가 불린다.

산업 · 교통

경지면적 3,724㏊ 중 논이 2,563㏊, 밭이 1,161㏊로서 논이 밭보다 많다. 가구당 경지면적은 119.5a이다. 주요 농작물은 쌀 · 옥수수 · 감자 · 콩 등 이외에도 참깨 · 들깨 등의 특용작물과 사과 · 배 · 복숭아 · 감 등이 생산된다. 2007년 현재 축산업 중 한육우는 4,280마리, 돼지 2만 5671마리가 사육되고 기타 닭, 오리, 칠면조 등이 사육되고 있다. 양봉은 서면이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임야면적은 5만 2480㏊ 중 국유림 3만 6004㏊, 공유림 1,707㏊, 사유림 1만 4769㏊이다. 임목지 5만 2480㏊ 중 활엽수림 2만 737㏊, 침엽수림 1만 7906㏊, 혼효림 1만 2710㏊이다. 주요 임산물은 종실류 중 밤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대추 · 잣 · 호두 · 버섯류 중 송이버섯이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밖에도 표고 · 느타리버섯 등이 생산된다. 2007년 송이 생산량은 145,824㎏이다.

어업가구 300가구, 어업인구 968명으로 어업인구는 감소하였다. 어선은 동력선 340척에 1,116.73t, 무동력선 8척에 4.08t으로 무동력은 어선 감축 계획에 의거 대폭 감소하였고 동력선은 증가하였다. 어항은 국가지정 2곳, 지방 지정 2곳, 위판장 6곳, 방파제 12곳, 물양장 12곳, 급유시설 1개 소가 있다. 동해연안의 작은 어항에서 영세적 어업이 행해진다. 주요 어획물은 명태 · 오징어 · 멸치 · 고등어 등이다. 특히, 손양면 송현리의 국립양양내수면연구소에서는 연어를 부화시켜 남대천을 통해 방류하는데, 연어의 회귀율이 점차 높아 가고 있어 성과가 기대된다.

지하자원으로는 서면 장승리의 양양철광산이 한 때 남한 제1의 철광산지를 이루었으나, 철광석의 고갈과 높은 생산비용으로 인해 1994년부터 휴광상태이다. 제조업은 부진해 양양읍에 냉동 · 냉장시설이 있을 뿐이고, 1994년부터 포월농공단지가 조성되었다.

상업활동은 예로부터 정기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770년대 군내에는 양양읍장이 3 · 8일, 동산장(洞山場)과 물치장이 4 · 9일, 부동장(府東場)이 3 · 8일, 상운장(祥雲場)이 5 · 10일에 개설되는 등 5개의 장이 있었다. 1830년대에는 개시일만 변동되어 양양읍장과 동산장이 4 · 9일, 물치리장과 상운장이 5 · 10일, 부동장이 3 · 8일에 개설되었다.

1912년대에는 읍내장이 4 · 9일, 물치장과 동산장이 5 · 10일에 개설되는 등 3개로 감소되었고, 1923년대에는 읍내장을 비롯해 물치리장이 5 · 10일, 교암장(橋巖場)이 1 · 6일, 기사문장(其士門場)이 5 · 10일에 개설되는 등 1개가 증설되었으나 2개 장이 신설되었다. 1926년대에는 기존의 4개 외에 현남면에 인구장(仁邱場)이 5 · 10일에 개설되어 5개로 증설되었다.

1938년대에는 기존의 5개 외에 도천면에 속초장(束草場)이 3 · 8일, 서면에 서림장(西林場)이 신설되어 7개로 증가되었다. 1963년대에는 읍내장 · 물치리장 · 인구장 등 3개만이 존속되었고, 1976년에는 3개장 중에서 물치리장이 3 · 8일에 개설되는 변동이 있었을 뿐이었다. 현재 양양읍의 읍내장 1개만이 있다.

교통은 동해고속도로와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관내를 지난다. 서쪽에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어 해안을 따라 도로가 발달하였다. 7번 국도가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달리고 있어 속초∼강릉 방면으로 통하고, 44번 국도가 한계령을 넘어 인제군 북면에서 46번 국도와 만나며, 56번 국도가 구룡령을 넘어 홍천군 내면에서 31번 국도와 연결된다.

한편, 시 · 군도가 9개 노선이 있어 각 읍 · 면 지역과의 교통이 이루어져 편리하다. 이들 노선을 보면 1번 임천∼강선, 2번 면옥치∼수산, 3번 월리∼답리, 4번 월리∼가평, 5번 여운포∼조산, 6번 입암∼상광정, 7번 황이∼어성전, 8번 현리∼하광정, 9번 삼산∼월리 등이 있다.

8 · 15광복 전에는 원산 부근의 안변(安邊)에서 양양읍까지 이어주는 동해북부선 철도가 운행되었으나 국도의 분단으로 철거되었다. 항공교통은 속초비행장은 폐쇄되고 양양국제공항이 건립되어 양양∼서울, 양양∼부산, 양양∼제주 노선이 운항되고 있고, 부정기 노선으로는 중국과 일본 항공기가 관광철에 운항하고 있다.

관광

이 지방 사람들은 예로부터 자기 고장의 산수(山水)가 아름다워 남다른 애향심을 갖고, 자기 향토를 지켜 왔다. 3 · 1운동 당시에는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고, 공산 치하에선 반공투쟁의 선봉에 섰다. 양양읍의 현산공원(峴山公園)에는 3 · 1운동기념비 · 행정수복기념비 · 충혼탑 · 필승탑 등이 있다.

그리고 특산물은 송이버섯 · 자철(磁鐵) 등인데, 오늘날은 남대천의 은어가 유명하다.

설악산국립공원의 일부인 남설악이 군의 서북부에 있고, 관동팔경의 하나인 낙산사와 오색약수터는 널리 알려진 관광지이다. 오색천 · 후천 · 남대천 계곡에는 개발해야 할 관광자원이 많다. 해안에는 이름난 해수욕장들이 연이어 있는데 설악 · 낙산 · 수산포 · 동호 · 하조대 · 남해 해수욕장 등이 있다.

관광코스는 한계령 방면으로는 백암리를 거쳐 오색약수터로 갈 수 있고, 홍천군 방면으로는 용소골을 거쳐 갈천약수터까지 갈 수 있는데, 약수는 위장병 치료에 특효가 있다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한편, 강현면 물치천 상류에 진전사지 · 진전사지삼층석탑 · 진전사지부도가 있다. 서면 미천골에는 신라시대 사찰인 선림원(禪林院)터가 있는데, 지금은 삼층석탑 · 석등 · 부도와 석조물이 이끼에 묻혀 있다.

십여 개의 크고 작은 계곡으로 이루어진 미천골은 맑은 물, 원시림 기암괴석 등이 한데 어우러져 대자연의 신비감을 더해준다. 또한, 미천골에는 이른봄부터 늦가을까지 무수한 꽃들이 피기 때문에 토종꿀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낙산사는 주위의 풍경이 뛰어나며, 낙산사의 동종 · 칠층석탑 · 홍예문 · 의상대 등의 문화유산이 많다. 특히 의상대의 해돋이 광경은 동해안에서 제일 아름답고, 풍경 소리를 들으면서 의상대 밤의 경치를 보는 것은 더 없는 즐거움이다.

이곳에도 석호인 매호(梅湖)가 있고, 부근 포매리에는 백로 및 왜가리 번식지가 있다. 관광위락시설은 낙산사와 오색약수터 부근에 숙박 시설과 음식점들이 집중되어 있으며, 부근에는 오색온천이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

매년 5월경에 진행되는 현산문화제는 1007년(고려 목종 10) 현 양양읍 성내리를 중심으로 양주성 또는 현산성을 축성하여 외적의 침입을 수호하는 기지로 삼고 현 성황당 자리에 성황사를 짓고 호국 영령을 위로하고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성황제로 매년 봄 · 가을로 지냈다. 1592년 이후부터는 매년 5월 5일 단오절을 기하여 장군성황신을 수호신으로 성황제를 지내고 굿을 성대하게 하였다. 1968년 군민들의 성미로 성황제를 매년 5월5일 단오제로 지내오다 향토고유의 전통문화제로 제정하기 위하여 1979년 2월 5일현산문화제위원회를 구성하여 전통성을 찾아 전래의 민속일인 음력정월 대보름을 제전일로 하여 제1회 현산문화제로 명칭을 정하고 전야제와 본제를 행하였다. 그러나 정월 대보름은 계절적으로 범군민적인 신행사를 하기는 적합치 못하여 1980년부터 이 고장이 기미만세운동 시 지방으로는 가장 치열했던 지역이기에 많은 열사가 순국한 점을 기려 3월 1일을 제전일로 정하여 4회 제전까지 행하였다. 1983년 제5회부터 이 고장 기미만세 운동의 역사성에 바탕을 두어 함홍기 열사가 일경의 대장실에 뛰어들어가 적수공권으로 항거하다가 장엄하게 순국하면서 이 고장 만세운동에 불이 붙기 시작한 실질적 시발일을 찾아 4월 4일로 변경하여 제7회부터 제11회까지 거행하여 오다가 제12회부터는 기후와 농사철을 감안, 뿌리 깊은 전통 축제였던 단오절을 전후하여 일자를 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양양송이축제는 매년 9월경에 강릉 남대천 둔치에서 진행되는데, 외국인 송이 채취 체험 행사가 열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내방한다. 연어축제는 매년 10월 경 남대천 둔치에서 펼쳐진다.

읍 · 면
  1. 양양읍(襄陽邑)

군의 중북부 동해안에 위치한 읍. 면적 32.35㎢, 4,567세대, 인구 1만 1,891명으로 남자 6,027명, 여자 5,864명(2015년 현재)이다. 읍 소재지는 군향리이다.

본래 1397년(태조 6)부터 부내면(府內面)이라 불려오다가 1894년군내면(郡內面)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부남면(部南面)과 위산면(位山面)을 병합해 군북면이 되었다가 1919년양양면이 되었다.

광복 후 공산치하에 있다가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의 시행에 따라 수복되었다. 1973년손양면의 상왕도리 일부를 편입했으며, 1979년양양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손양면 가평리 · 송현리 일부가 송암리에 편입되었다.

서부지역은 산지지형이 탁월하고 전 면적의 58%가 산지이다. 남서부의 태백산지에서 발원한 남대천이 읍의 남동부를 손양면과 경계를 이루면서 동해로 흘러들고, 그 하류유역에 기름진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태백산맥이 겨울의 찬 북서계절풍을 막고, 동해에 면해 한서의 차가 작고 겨울철의 기온은 온난하다.

논이 밭보다 많으며, 남대천 유역의 평야를 중심으로 쌀 · 보리 · 소채류 및 과일 등의 생산이 많고, 젖소사육과 양봉이 성하다. 토산물로는 송이버섯과 남대천의 은어가 유명하다. 포월리에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있고, 시장은 읍내장이 열리고 있어 관내의 경제 · 행정 · 교통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교통은 7번 국도가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어 속초와 강릉 방향과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44번과 56번 국도와 이어져 한계령을 통해 인제 · 구룡령을 통해 홍천과 연결된다. 또한, 1번 시 · 군도가 임천∼강선, 3번이 월리∼강현, 4번이 월리∼가평, 5번이 여운포∼조실, 9번이 삼산∼월리를 연결하는 등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을 원활히 연결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임천리에 양양향교 · 고분 · 석성지가 있고, 화일리에 영혈사요사(靈穴寺寮舍)채, 감곡리와 기정리에 고분, 송암리에 사지 등이 있다. 조산리의 해수욕장은 낙산해수욕장과 연결된 곳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2개 교, 고등학교 2개 교, 관동대학교 공과대학이 있다.

군향(軍餉) · 성내(城內) · 구교(舊校) · 연창(連昌) · 송암(松巖) · 청곡(靑谷) · 포월(浦月) · 조산(造山) · 사천(仕川) · 기정(基丁) · 감곡(甘谷) · 화일(禾日) · 거마(車馬) · 임천(林泉) · 내곡(柰谷) · 서문(西門) · 남문(南門) · 월(月) 등 18개 리가 있다.

  1. 강현면(降峴面)

군의 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52.77㎢, 1,937세대, 인구 4,433명으로 남자 2,270명, 여자 2,163명(2015년 현재)이다. 면 소재지는 정암리이다. 본래 양양 지역으로 한말까지 강선면(降仙面) · 사현면(沙峴面) 등 2개 면으로 되어, 강선면은 둔전동(屯田洞) · 상복동(上福洞) · 석교(石僑) · 물치진(沕淄津) 등의 리, 사현면은 소근교(小斤橋) · 북동(北洞) · 물감(勿甘) · 노동(魯洞) 등의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2개 면과 도문면(道門面) 도문리 일부가 병합되어 두 면의 이름을 따서 강현면이 되었다. 광복 후 공산치하에 있다가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의 시행에 따라 수복되었다.

서쪽으로 태백산맥의 설악산 · 화채봉 · 관모산 등이 있어 동쪽으로 급경사를 이룬다. 설악산에서 발원해 동쪽을 지나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물치천 유역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쌍천(雙川)이 속초시와 경계를 이루면서 동해로 흘러든다.

논이 밭보다 많으며, 쌀과 감자 · 옥수수 · 콩도 많이 생산된다. 그리고 한우사육과 양돈이 성하고, 한약재인 당귀 · 세신(細辛) · 작약 등이 산출된다. 어업은 2t 미만의 소형어선으로 물치리와 전진리를 중심으로 영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교통은 7번 국도가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어 있다. 1번 시 · 군도가 강선∼하복∼임천, 3번이 월리∼답리를 연결해 비교적 편리하다. 양양국제공항 건립으로 속초공항은 폐쇄되었다.

문화유적은 둔전리에 진전사지삼층석탑 · 진전사지부도 · 진전사지, 전진리에 낙산사칠층석탑 · 낙산사동종 · 낙산사홍예문 · 낙산사담장 · 낙산사 · 의상대 · 낙산사사리탑 · 낙산사홍련암 · 낙산사원통보전과 기우정, 석교리에 김병수(金炳壽)의 처 경주이씨 열녀비, 적은리 김경길(金景吉) 효자각 등이 있다.

사교리에는 강릉 김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동해안에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낙산사를 비롯해 설악해수욕장 · 낙산해수욕장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정암(釘巖) · 물치(沕淄) · 강선(降仙) · 하복(下福) · 중복(中福) · 상복(上福) · 회룡(回龍) · 장산(長山) · 석교(石橋) · 둔전(屯田) · 물갑(勿甲) · 사교(沙橋) · 금풍(金風) · 침교(砧橋) · 적은(積銀) · 방축(防築) · 광석(廣石) · 답(畓) · 전진(前津) · 용호(龍湖) · 간곡(間谷) · 주청(酒廳) 등 22개 리가 있다.

  1. 서면(西面)

군의 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267.65㎢, 1,410세대, 인구 3,303명으로 남자 1,690명, 여자 1,613명(2015년 현재)이다. 면 소재지는 상평리이다.

본래 양양군 서쪽에 있으므로 서면이라 하여 공수전 · 영덕 · 서림 · 미천 · 청대(靑臺) 등 21개 이를 관할하였다.

광복 후 5개 마을만이 남한에 있게 되어 강릉군 신서면(新西面)에 속했다가, 1954년〈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의 시행에 따라 수복되었다. 1973년명개리를 홍천군 내면(內面)으로 이속시켰다.

군내에서 면적은 넓으나 대부분이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어 경지가 군내에서 가장 좁다. 즉, 관모산 · 설악산 · 점봉산 · 매복산 · 조봉(祖峰, 1,182m)이 면을 감싸고 있어 90% 이상이 산지이고, 서림천 · 오색천 · 장승천(長承川)이 흘러 남대천과 합류해 동해로 흘러든다. 서림천과 장승천이 합류하는 북평리 일대에 비교적 넓은 경지가 전개된다.

북평리에서 쌀이 생산되며, 옥수수 · 콩 · 감자의 생산과 양봉 · 양돈도 한다. 특산물로는 송이버섯 · 산채 · 한약재 등이 생산되며, 남대천 상류에는 은어와 산천어가 서식한다. 장승리에는 자철광이 매장된 양양철광산이 있으나 1994년 이후 폐광되었다.

교통은 논화리에서 갈라진 44번 국도가 오색천계곡을 따라 개설되어 한계령을 통해 인제군 · 홍천군 및 양양읍과 연결된다. 56번 국도는 서림천계곡을 따라 송천리 · 공수전리 · 영덕리 · 갈천리 등을 지나 구룡령을 통해 홍천군 내면과 연결된다. 7번 시 · 군도가 환이∼어성전, 8번이 현리∼하광정, 9번이 삼산∼월리까지 연결되는 등 매우 편리해 졌다.

문화유적은 서림리에 선림원지삼층석탑 · 선림원지석등 · 선림원지흥각선사탑비 · 선림원지부도 · 양양선림원지, 오색리에 삼층석탑, 서선리에 이두형가옥, 범부리에 지석묘 등이 있다. 설악산국립공원의 남쪽 관문인 오색약수를 중심으로 한 한계령 일대의 남설악은 주요 관광자원이고, 서림천 계곡을 따라 미천골유원지와 갈천약수를 중심으로 관광객이 많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와 분교 2개 교가 있다.

상평(上坪) · 범부(凡阜) · 북평(北坪) · 용천(龍泉) · 수상(水上) · 수(水) · 내현(內峴) · 서선(西仙) · 장승(長承)1 · 장승(長承)2 · 장승(長承)3 · 논화(論化) · 송천(松川) · 공수전(公須田) · 오색(五色)1 · 오색(五色)2 · 용소(龍沼) · 영덕(盈德) · 서림(西林) · 갈천(葛川) · 황이(黃耳) 등 20개 리가 있다.

  1. 손양면(巽陽面)

군의 중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47.31㎢, 1,105세대, 인구 2,572명으로 남자 1,310명, 여자 1,262명(2015년 현재)이다. 면 소재지는 하왕도리이다.

본래 양양군의 남쪽 지역이므로 남면이라 하여 와동 · 간동 · 상왕도 등 18개 이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면과 송남면을 합해 손양면으로 개칭되었다.

광복 후 공산치하에 있다가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의 시행에 따라 수복되었다. 1973년상왕도리 일부가 양양면 월리로 편입되었으며, 1989년가평리 · 송현리 일부가 양양읍 송암리로 편입되었다.

단조로운 해안선을 따라 북부의 가평리와 남부의 상운리에는 넓은 사빈이 있고, 학포리에는 쌍호(雙湖), 여운포리에는 여운포 등의 석호가 형성되어 있다. 쌍호는 원래 2개의 호수가 나란히 있었으나, 내륙쪽의 호수는 농경지로 간척되어 수여리 · 상운리와 함께 벼농사 중심지를 이룬다. 남대천이 양양읍과 경계를 이루면서 동해로 흘러든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옥수수 외에 채소류가 생산된다. 특산물로는 송이버섯과 감, 그리고 남대천의 은어를 들 수 있다. 어업은 면내 유일한 어항인 수산항을 중심으로 명태와 오징어잡이를 하고 있으나 규모는 영세하다. 특히, 송현리의 내수면연구소에서는 연어를 부화시켜 남대천을 통해 동해로 방류하는데, 연어의 회귀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어 앞으로의 기대가 크다.

교통은 7번 국도가 남북으로 뻗어 양양∼속초 및 강릉 등지와 연결되며, 2번 시 · 군도가 수산∼면옥치, 5번이 여운포∼조산까지 연결되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오산리에 선사유적, 수산리에 봉수대, 송전리에 송림사지(松林寺址) · 선사유적지 등이 있다. 그리고 해수욕장은 오산리에 오산해수욕장, 수산리에 수산포해수욕장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오산리에 양양선사박물관, 학포리에 양양국제공항이 있다.

하왕도(下旺道) · 송현(松峴) · 수여(水余) · 금강(金崗) · 송전(松田) · 가평(柯坪) · 오산(鰲山) · 학포(鶴浦) · 도화(桃花) · 수산(水山) · 동호(銅湖) · 상운(祥雲) · 여운포(如雲浦) · 하양혈(下陽穴) · 상양혈(上陽穴) · 밀양(密陽) · 주(舟) · 우암(牛巖) · 와(瓦) · 간(間) · 석계(石界) · 삽존(揷存) · 부소치(夫蘇峙) · 상왕도(上旺道) 등 24개 리가 있다.

  1. 현남면(縣南面)

군의 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64.30㎢, 1,610세대, 인구 3,499명으로 남자 1,768명, 여자 1,731명(2015년 현재)이다. 면 소재지는 인구리이다.

본래는 고구려 때 혈산현(穴山縣)이었다가 신라시대에 동산현(洞山縣)으로 개칭되어 명주의 속현이었다가 고려 현종 이후로 양양군의 관할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 동산현이 현북면과 현남면으로 양분되어, 현남면은 월내(月川) · 견불 · 원당(元堂) · 북분 · 양야진(陽也津) · 인구역(獜丘驛) 등의 이를 관할하였다. 광복 후 공산치하에 있다가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의 시행에 따라 명주군에 편입되었고, 1963년 다시 양양군에 귀속되었다.

면의 서쪽에 위치한 태백산맥의 지맥이 동해쪽으로 급경사를 이루어 60% 이상이 산지이다. 삼형제봉 북쪽에서 발원한 화상천(和尙川)이 동쪽으로 흐르면서 하월천리 · 주리 · 임호정리 등을 지나 원포리에서 동해로 흘러든다.

만월산 동쪽에서 발원한 해송천(海松川)은 정자리 · 죽리를 지나 인구리에서 동해로 흘러든다. 인구리에는 죽도(竹島)가 사주에 의해 연결된 육계도가 있고, 전매포리에는 석호인 매호(梅湖)가 있으며, 화상천 하류에는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산업으로는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쌀을 비롯한 농업이 행해지며, 양계도 많이 한다. 특산물로는 약초 · 산채 · 버섯 등이 있다. 어업의 중심지는 동산리 · 인구리 · 남애리 등이나 영세하다. 교통은 7번 국도가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어 양양군과 속초 및 강릉 등지와 연결되고, 6번 시 · 군도가 입암∼상광정까지 연결되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전포매리에 백로 · 왜가리 번식지와 조규승가옥 · 매월사, 시변리에 김택준가옥, 북분리에 김성래가옥, 후포매리에 고분군, 인구리의 죽도정, 두창시변리 비석군 등이 있다. 인구리와 남애리에는 죽도와 남애해수욕장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에 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인구(仁邱) · 북분(北盆) · 동산(銅山) · 두(斗) · 창(昌) · 시변(市邊) · 죽(竹) · 정자(亭子) · 광진(廣津) · 전포매(前浦梅) · 후포매(後浦梅) · 견불(見佛) · 상월천(上月川) · 하월천(下月川) · 주(酒) · 입암(笠巖) · 임호정(臨湖亭) · 원포(遠浦) · 지(池) · 지경(地境) · 남애(南涯) 등 21개 리가 있다.

  1. 현북면(縣北面)

군의 중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164.44㎢, 1,403세대, 인구 3,001명으로 남자 1,537명, 여자 1,464명(2015년 현재)이다. 면 소재지는 하광정리이다.

본래 동산현(洞山縣) 지역으로 조선 후기에 현북면과 현남면으로 양분되어 현북면은 도동(陶洞) · 말곡 · 광정(廣汀) · 대치(大峙) 등 5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잔교 등 14개 이를 관할하다가, 광복 후 공산치하에 있었으나 1954년 「수복지구임시조치법」의 시행에 따라 다시 현북면이 되었다.

면의 서쪽에 위치한 태백산맥의 지맥이 동쪽으로 급경사를 이루어 산지가 많고 골짜기가 깊다. 복룡산 북쪽에서 발원한 남대천이 법수치리 · 어성전리 · 원일전리 · 도리를 지나 서면으로 흘러든다. 그러나 평지는 거의 없다. 대치리 부근에서 발원한 광정천(光丁川)이 동쪽으로 흘러 동해로 흘러드는데, 하류에 약간의 평지를 형성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잡곡 · 콩류 등이다. 어성전리의 송이는 유명하고, 산채 · 벌꿀의 생산도 많다. 어업은 기사문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나 영세적이다.

교통은 7번 국도가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어 양양, 속초 및 강릉 등지와 연결된다. 특히 어성전리를 중심으로 6번 시 · 군도가 입암∼상광정, 7번이 어성전∼황이, 8번이 하광정∼서림, 9번이 법수치∼월리 등 사방으로 연결되어 산간 지역의 교통이 많이 개선되었다.

문화유적은 어성전리에 명주사동종 · 명주사부도, 대치리에 오동선(吳東善)의 처 연암김씨 열녀각 등이 있다. 하광정리에는 하조대해수욕장, 잔교리에는 38선표지와 38선휴게소가 있으며, 어성전리의 풍치는 어성십경(魚城十景)이라 하여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하광정(下光丁) · 기사문(其士門) · 잔교(棧橋) · 대치(大峙) · 말곡(末谷) · 중광정(中光丁) · 상광정(上光丁) · 명지(明池) · 어성전(魚城田) · 법수치(法水峙) · 면옥치(綿玉峙) · 원일전(元日田) · 장(獐) · 도(陶) 등 14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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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군(www.yangya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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