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에, 중종의 아들인 복성군의 스승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계기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으며, 『원정실기』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당시 여희림은 도학과 문장으로 크게 명성이 나 있었으며, 김안국(金安國)·소세양(蘇世讓)·정사룡(鄭士龍) 등과 교우관계를 가졌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하고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도의로 교우를 맺었다.
1510년에는 서경덕(徐敬德)을 찾아가 변역(變易)·소장(消長)의 이치에 관해 문답, 서로 계합한 바 있다. 1516년에는 고향에 내려가 주자(朱子)가 가감, 증보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였다.
그 이듬 해 정광필(鄭光弼)의 추천에 의해 불차탁용(不次擢用)으로 복성군(福城君)의 사부가 되었다. 1519년 현량과(賢良科)가 설치되자 여희림의 형 여희단(呂希端)과 함께 천거되었으나 응시를 거절, 기묘사화에 화를 면하였다.
1533년 김안로(金安老)가 경빈박씨(敬嬪朴氏)를 폐하고 복성군을 연일(延日)로 귀양보낼 때 전일에 사부를 지냈다는 이유로 기장(機張)에 유배되었다가 함평에 이배 후 풀려났다. 1538년 다시 등용되어 지평에 이르렀다. 성주의 천곡사(川谷祠)에 제향되었다. 여희림의 사적 등을 수록한 『원정실기(圓亭實紀)』가 있다.
참고문헌
-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 『원정실기(圓亭實紀)』
- 『중종실록(中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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