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은 못이라는 말로부터 파생된 말이다. 못은 자연적으로나 인위적으로 넓고 깊게 팬 땅에 늘 물이 괴어 있는 곳을 가리킨다. 못을 뜻하는 글자로는 지(池) · 소(沼) · 당(塘) · 방축(防築)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지는 못 자체를 가리키는 글이고, 소는 자연의 힘에 의하여 땅이 우묵하게 팬 자리에 늘 물이 괴어 있는 곳을 뜻하는 글이다.
우리말로는 이것을 늪이라고 하며 못보다는 규모가 큰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여왔다. 그러나 지자와 결합하여 지소(池沼)라 할 때에는 온갖 못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당은 원래 물을 막기 위하여 쌓은 둑을 가리키는 글자로서 못을 만들기 위하여 쌓은 둑을 지당(池塘)이라 하다가 인위적으로 꾸민 못을 가리키는 말로 전용되어왔다.
또한, 방축도 당과 같은 뜻의 말인데, 이것 역시 그 뜻이 변하여 인위적으로 조성된 못을 가리키는 말로 쓰여왔으며 일반적으로 방죽이라고 발음한다. 부여의 궁남지(宮南池)를 그 고장사람들이 마래방죽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한 예이다. 이와 같이 못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도 있고, 인위적으로 꾸며놓은 것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못이라고 하면 인위적으로 꾸며진 것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못은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 꾸며진다. 고대사회에서는 농경지의 관개를 위한 저수지와 군사상의 필요에 따르는 군용지(軍用池)가 주로 조성되었다.
저수지의 예로는 백제가 조성해 놓은 벽골제(碧骨堤 :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소재)와 신라 때 것으로 알려진 의림지(義林池 : 충청북도 제천시 소재), 공검지(共檢池 : 경상북도 상주시 소재)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군용지로서는 신라의 반월성과 고구려의 안학궁(安鶴宮)의 수비를 위하여 성루 밑에 파놓은 해자와 안학궁에 딸린 피난산성인 대성산성(大聖山城) 속에 파놓았던 수많은 용수지(用水池) 등이 알려져 있다.
한편, 원시시대를 벗어나 문화가 점차 발달되어감에 따라 왕궁이나 권력자들의 저택 안에 정원이 꾸며지기 시작하였다. 정원을 꾸미는 목적은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경관의 아름다움은 지형과 물, 그리고 식물이라는 세 가지 요소에 의하여 형성되며 그 어느 한 요소가 빠져도 아름다운 정원은 꾸며낼 수가 없다.
그러한 까닭에 정원 안에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여러 가지 기법이 고안되었으며, 그 가운데에서 가장 손쉽고 보편적인 것이 못을 파놓는 방법이었다. 또한, 못의 운치를 돋우기 위하여 물 속에 섬을 쌓아올리거나 수초를 심어 가꾸는 방법이 실시되었다.
고려시대가 되어 불교가 성행하는 한편, 송나라와의 빈번한 교류가 시작되면서 유학자인 주돈이(周敦頤)가 지은 그 유명한 ≪애련설 愛蓮說≫이 소개되었다. 이러한 일들의 영향을 입어 수초로서는 연(蓮)을 즐겨 가꾸는 경향이 늘어나 마침내는 정원 안에 꾸며놓은 못을 연못 또는 연지 · 연당 등으로 부르기에 이른다.
연못, 즉 관상을 위하여 꾸며지는 못의 역사는 꽤 오래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문헌상에 나타나는 것은 백제의 진사왕(辰斯王)이 신묘(辛卯) 7년(391)에 한산성 안에 못을 파고 가산(假山)을 쌓아 아름다운 물새를 키우고 진귀한 꽃을 심어 가꾸었다(穿池造山以養奇禽異卉)고 하는 것이 그 최초이다.
고구려 장수왕은 정묘(丁卯) 15년(427)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에 앞서서 그곳에 왕궁인 안학궁을 축조하였다. 북한의 고고학자들이 보고한 바에 의하면 중궁지(中宮址) 서편에는 물가에 가산이 쌓인 연못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500년에는 백제의 동성왕이 공산성 안에 못을 파 놀이터로 삼았으며(起臨流閣於宮東……又穿池養禽), 29대 무왕은 나라가 망하기 29년 전인 634년에 부여의 남쪽 교외에 모후를 위한 이궁을 짓고 그 앞에 큰 연못을 팠다. 이것이 오늘날 궁남지라고 불리는 이 연못이다.
물 가운데에 섬을 쌓아 방장산(方丈山)으로 삼고 물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20여리나 되는 먼 거리로 물을 끌어들였다(穿池於宮南引水二十餘里四岸植以楊柳水中築島嶼0x9744方丈仙山)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신라는 국토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해놓은 직후인 674년(문무왕 14)에 반월성 밖에 큰 연못을 꾸며놓았다. 이것이 오늘날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연못으로서 조선시대에는 한때 안하지(安夏池)라고도 불렸다.
고려시대가 되어 불교가 국교로서 성행함에 따라 도성 안팎에는 수많은 사찰이 지어졌고 사찰마다 보편적으로 연지가 꾸며지는데 이것은 선(禪)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연지의 물가에 세워지는 모정(茅亭)은 분향전차(焚香煎茶)하여 참선하는 자리로서 마련되며, 물 속에 심어 가꾸어지는 연꽃은 식선(識禪)의 방도가 되었던 것이다.
사찰에 있어서의 이러한 풍습은 민간의 은일(隱逸)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관심거리가 되어 일반 저택의 정원에도 연못을 꾸미는 일이 보편화되어갔다. 한편, 궁궐 속에서도 연못이 꾸며졌다.
1116년(예종 11) 청연각의 뜰에 가산을 곁들인 연못이 꾸며진 것(厥內淸○閣○楯之外疊石成山庭除之際引水爲沼)과 1157년(의종 11)에 태평정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돌을 모아 가산을 쌓아 폭포를 꾸몄다(亭南鑿池……恠石作成山引遠水爲飛泉云云)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고려 초기부터 궐밖에 동지(東池)라고 하는 큰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 기록도 보인다.
동지에는 용선(龍船)을 띄워 놀이도 하고 과거를 보는 자리로도 쓰였다고 하니 꽤 규모가 큰 연못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서는 민간 주택의 꾸밈새가 ㅁ자형 또는 二자형으로 바뀌고, 규모 또한 점차적으로 커지면서 대문 밖의 바깥마당 좌우에 담장 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빗물이나 하수를 처리하는 한편, 방화용수로도 쓰기 위하여 두 개의 못이 꾸며진다.
이것은 풍수에서 말하는 주작(朱雀)의 오지(汚池)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대문 밖 알맞은 자리에 못이 있으면 주위에 나무나 꽃을 심어 물의 경관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정리이고, 그러다 보면 물가에 아담한 정자를 지어 외별당(外別堂)으로 삼는 지혜도 생겨난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꾸며졌던 못에 연도 심어 관상을 위한 소위 연못으로 탈바꿈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대문 밖에 두 개의 못이 있는 것은 그 형상이 곡(哭)자와 같으므로 하나를 없애야 한다는 설이 나온다.
그 설에 의하면 풍수상 백호에 해당하는 서쪽에 못을 파놓은 것은 호랑이가 입을 벌려 덤벼드는 형상(白虎開口形)이고, 동쪽인 청룡에 못이 있는 것은 격에 맞으므로 서쪽의 못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설에 따라 그 뒤로는 대문 밖 동쪽에만 못을 꾸미는 것이 일반화된다.
한편, 담장 안에는 일반적으로 못을 꾸미지 않았다. 건물에 가까운 자리에 못을 파놓으면 땅속으로 스며드는 습기로 방고래에 불이 들어가지 않으며, 습한 기운이 사람을 병에 걸리게 한다 하여 이것을 피하였던 것이다.
궁궐의 경우에는 주로 후원에 못이 꾸며져 놀이를 위한 자리로 쓰였으나, 경복궁의 경회루지(慶會樓池)와 향원지(香遠池)처럼 후원이 아닌 곳에 꾸며지는 예도 있었다. 후원은 자연을 그대로 살려 골짜기를 따라 물이 모여드는 자리에 못을 파고 물가에 정자나 당(堂)을 지어놓았다.
창덕궁의 후원, 즉 비원에는 부용지(芙蓉池)와 애련지(愛蓮池), 그리고 반도지(半島池)가 있는데, 반도지는 국권상실 후 일인들의 손에 의하여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은 반도형으로 개축되면서 그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경복궁의 경회루지는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꾸며놓은 것이 아니었다.
경복궁의 창건과 더불어 그 자리에 세워졌던 작은 누각이 땅이 습해서 기울어졌으므로 태종 때에 규모를 크게 개축하는 한편, 습기를 처리하기 위하여 누각 주위에 못을 판 것에서 유래된다. 이 자리는 주로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자리로 쓰이는 한편, 관무(觀武)하는 자리로도 쓰였다고 한다.
향원지는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청궁(乾淸宮)의 정원으로 삼기 위하여 꾸민 못인데, 원래 이 자리는 임금이 손수 벼를 심던 내농포(內農圃)가 있던 곳이다.
그 밖에 풍수설이 가리키는 바에 따라 주작에 해당하는 광화문 안에 두개의 연못이 꾸며져 있었고, 광화문 밖에 자리한 육조(六曹)에도 각기 못이 있어서 여름이 되면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났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못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그 하나는 물가의 선이 자연스럽게 굴곡한 것이고, 또 하나는 네모 반듯하게 직선형으로 꾸며진 것이다. 전자를 곡지(曲池)라 하고 후자를 방지(方池)라고 하는데 오랜 옛날부터 이 두 가지 형태의 못이 꾸며져왔다.
그러나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곡지는 자취를 감추고 방지만을 선호하게 된다. 즉, 5세기초에 꾸며진 안학궁 안에는 곡지와 방지가 함께 꾸며져 있었고, 백제의 경우에는 동성왕이 공산성 안에 꾸민 못이 방지이고, 무왕이 꾸몄다고 하는 이궁의 못은 곡지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수년 전 부여의 왕궁지로 보이는 곳에서 규모가 작은 방지가 발굴된 일도 있다. 신라의 경우에는 방지가 발견된 적이 없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예에 비추어 볼 때 안압지와 같은 곡지와 함께 방지도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존하는 고대의 못과 이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을 견주어볼 때 천지조산(穿池造山)이라 기록된 것은 그 모두가 곡지의 형태로 꾸며졌고 규모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즉, 물가에 산의 모양을 꾸며놓을 경우 그것과 어울리는 못의 형태는 직선적인 윤곽을 가진 것보다 자연스러운 형태이어야 하며, 규모도 커야만 서로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연못은 경주의 안압지에서 볼 수 있듯이 대개 못속에 3개의 섬이 꾸며진다. 이것은 신선이 산다고 하는 봉래(蓬萊) · 방장(方丈) · 영주(瀛州)의 세 산을 상징한 것으로서 정원 소유자의 불로장수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꾸밈새의 못을 신선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고대 중국의 정원 기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신선형의 못은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 한 두 가지의 예외는 있다. 경복궁의 경회루지와 남원의 광한루 앞에 자리한 못이 그것이다. 이 두 못은 조선시대 초엽에 꾸며진 것인데 못 속에 각기 세 개의 섬이 축조되어 있다.
곡지가 넓은 자리에 조성된 데 대하여 방지는 주로 협소한 자리에 못을 꾸미고자하는 경우 택해진 형태이다. 고려시대 때 일반인의 저택에 못이 꾸며지면서 방지의 형태가 성행하는데 그 추세는 조선시대로 이어져 마침내는 방지 일변도가 되어버린다.
고려시대의 방지에는 섬이 없었으나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못 한가운데에 둥근 섬을 만드는 기법이 시작되며, 이것을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이라고 한다.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 가리키는 바에 따르면 네모진 못의 윤곽은 땅을 상징하고 둥근 섬은 하늘을 뜻한다. 땅을 음으로, 하늘을 양으로 해석할 때 방지원도형의 못은 바로 음과 양이 결합된 형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방지원도형의 못은 음양의 결합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대자연의 섭리를 상징하며 자손이 번영되기를 기원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꾸밈새는 바로 유교의 영향을 입은 것이다. 또한, 전라남도지방에서는 원도 위에 세 개의 돌을 앉혀 삼산(三山)이라 부르던 사례가 많은데 이것은 신선형의 유물이다.
한편, 네모진 못속에 네모난 섬이 꾸며져 있는 것을 방지방도형(方池方島形)이라고 한다. 방도는 고려 초기까지 지신제(地神祭)를 지내는 경우, 물 속에 네모난 형태로 흙을 쌓아 제단으로 삼던 방택(方澤)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지신은 생산을 관장하는 신임을 감안할 때 방지방도형의 못 역시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때로는 아래위로 두 개의 방지를 나란히 꾸며 위의 못에는 연을 가꾸고 아래 못은 양어장으로 삼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쌍지(雙池)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