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는 국도인 상경(上京)을 중심으로 하여 각 방면에 이르는 교통로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에 장령부(長嶺府)는 영주(營州)로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이 교통로는 당나라의 장안(長安)으로 직통하는 육로교통의 간선도로였으나, 거란(契丹)·돌궐(突厥) 및 안사(安史)의 난으로 여러 차례 차단됨으로써 발해와 당나라와의 사신교환에는 점차 압록부(鴨淥府)의 조공도(朝貢道)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 구체적인 경로는 『신당서』 지리지에 인용된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상경에서 출발하여 첫 도읍지였던 돈화(敦化)를 지나 장령부(현재의 길림성 해룡현 산성진) 관내를 통과한 다음 심양(瀋陽)·흑산(黑山)·북진(北鎭)·의현(義縣 : 당시의 燕郡城)을 거쳐 영주에 이른다.
영주는 현재의 요령성 조양(遼寧省朝陽)으로, 당시에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를 두어 당나라의 동방경략의 전진기지로 삼았던 곳이다. 이곳으로부터 다시 고북구(古北口)를 지나 당나라의 장안에 이르게 된다.
이 교통로를 이용한 구체적인 사례로서는, 732년에 발해가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자 당나라측이 대문예(大門藝)를 유주(幽州)에 보내어 발해를 치도록 한 데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