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제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및 제11대 대이진(大彛震) 시대에 활동하여, 821· 827· 848년 세 차례에 걸쳐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821년과 827년에 일본에 파견될 때에는 그의 관작이 정당성 좌윤(政堂省左允)이었고, 848년에는 영녕현승(永寧縣丞)이었다. 3차 파견 이후의 행적을 알 수 없어 최후의 관작은 알 수 없다.
821년 국서와 물품을 가지고 발해를 출발하여 11월 일본에 도착한 뒤 일본 수도에 들어갔다. 이듬해 정월 그의 일행은 일본 왕이 베푼 잔치에 참석해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인 답가(踏歌)를 관람하고 타구(打毬)경기도 시연해 보였다. 타구경기를 관람한 일본 왕은 면(綿) 200둔(屯)을 내려 내기를 걸었고, 일본 왕과 신하 시게노노사다누시(滋野貞主)가 이를 관람하면서 화답한 시가 전해진다. 1월 말에 일본 왕의 국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827년 말에 두 번째로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 다지마국(但馬國)에 도착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발해 사신 100여 명이 도착했다는 보고를 했으나, 다지마국은 정해진 기일을 어기고 일찍 왔다고 하여 이들의 입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2월에 다지마국이 발해국서와 중대성첩(中臺省牒)을 베껴 일본 조정에 보고하였고, 4월에 일본 조정으로부터 견(絹) · 면(綿)을 선물받고 귀국하였다.
세번째로 일본에 파견된 848년은 대이진이 발해를 통치하던 때이다. 그는 100명의 일행을 이끌고 848년 발해를 출발해 도중에 표류하다가 12월 일본 노토국(能登國)에 도착하였다. 이듬해 4월에 일본 조정은 이들이 비록 양국 사이에 약속했던 기일보다 일찍 일본에 파견되었지만, 멀리서 오느라고 고생이 심했음을 감안해 일본 수도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고, 홍려관(鴻臚館)에 안치시켜 위로하였다. 5월에 일본 왕에게 국서와 발해에서 가져간 물품을 전하였고, 일본 왕은 822년에 주었던 정3위(正三位)에서 한 등급을 올려 종2위(從二位)의 위계를 그에게 주고 잔치를 베풀었다. 일행은 보름 정도 머문 뒤에 발해에 보내는 국서와 태정관(太政官) 첩 등을 가지고 5월에 귀국하였다. 한편, 그는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아서 여러 친왕(親王) 가운데 장차 일본 왕에 즉위할 사람을 예견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