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제3대 문왕시대에 활동하여, 일본에 대사(大使)로 파견된 762년에는 관작이 자수대부 행정당성 좌윤 개국남(紫綬大夫行政堂省左允開國男)에 이르렀지만, 그 뒤의 행적과 최종관작은 알 수 없다.
762년 가을에 23명의 사신단을 이끌고 일본으로 출발하여 10월 초하루에 일본 에치젠국(越前國) 가가군(加賀郡)에 도착하였는데, 여기에는 지난해 겨울 발해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귀국하는 일본사신 이키노마스마로(伊吉益麻呂) 일행도 동행하였다. 윤12월에 일본 수도에 들어갔고, 이듬해 정월 초 발해에서 가져간 물품을 왕에게 전하였다. 일본 왕은 그에게 정3위(正三位)를 내렸고, 일행에게도 차등있게 위계를 주었으며 잔치와 음악 연주에 참관시켰다.
한편 그는 당나라의 정세에 대해서 보고하였는데, 당시 당나라는 현종(玄宗)·숙종(肅宗)이 죽고 대종(代宗)이 섭정하고 있으며, 사조의(史朝義)의 난이 아직 평정되지 않아서 당나라와 통하려면 오직 쑤저우(蘇州)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전하였다. 그 뒤에도 이들은 활쏘기 의식에 참여하였고, 도다이지(東大寺)에서 예불하기도 하였다.
2월에 이르러 일본 태사(太師)로부터 향응을 받고, 일본 왕으로부터도 잡색(雜色)의 겹옷 30궤(櫃)를 선물로 받았다. 또 귀국할 배가 낡았기 때문에 일본 조정에서는 배를 수리해주고 이타부리노카마다바(板振鎌束)를 선사(船師)로 삼아 2월 20일에 귀국시켰다. 그런데 이타부리노카마다바가 귀국할 때에 폭풍을 만나자 배에 탔던 일본 유학생 가족 등을 바다에 던져 죽임으로써 귀국 후에 감옥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