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는 고아(孤兒)라고 불렀다. 그러나 최근 고아라는 말보다는 ‘요보호아동’이라는 말로 많이 쓰이고 있으며, 이들은 현재 영아원이나 보육원에서 양육, 보호받고 있다.
아동복지법 제2조에 의하면 ‘요보호아동’이란, 아동이 그 보호자로부터 유실, 유기 또는 이탈된 경우 그 보호자가 아동을 양육하기에 부적당하거나 양육할 능력이 없는 경우 또는 기타의 경우에 이 법의 보호를 받을 아동을 말한다. 고아, 기아, 가출아, 부랑아, 시설퇴소 연장 아동, 미혼모의 사생아, 소년소녀가장, 보호자에 의해 학대받거나 방치되고 있는 아동, 저소득 결손가정의 아동 등이 이 범위에 속하게 된다.
이 아동들은 두 가지 범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가정에서 이탈된 아동들이다. 아동은 그들의 가정에서 부모가 기르는 것이 정상적일 뿐만 아니라 최선의 양육방법이기도 하다. 불우아동들은 어떤 이유로 그들의 가정이 온전치 못한 아동들이다. 그래서 심각한 경우는 원래의 가정에서 살 수 없어 그의 가정 밖에서 양육해야 될 아동들이다. 고아, 기아, 부랑아, 가출아, 친권을 포기한 미혼모의 사생아, 시설퇴소 연장 아동이 이 범주에 속한다.
두 번째는 그의 가정에서 살고 있는 불우한 아동이다. 가정의 경제사정이 너무 어렵거나 양육환경이 불량한 가정에서 살고 있거나, 결손된 가족구조로 인하여 아동의 성장에 어려움이 있는 가정에서 살고 있거나, 자녀를 돌볼 의지가 부족하거나 장애, 약물중독, 질병 등으로 인하여 자녀를 보호할 능력이 결여된 부모와 살고 있는 아동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대로 둔다면 결과적으로 아동이 가정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거나 심하게 왜곡 성장하게 될 우려가 있는 아동들이다. 또한 가정에서 보호자에게 학대받거나 또는 방임되는 채로 자라는 아동, 소년소녀가장, 빈곤가정의 아동, 저소득결손가정의 아동들을 꼽을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고아대책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신라 3대 왕 때인 28년(유리왕 5) 왕명으로 전국의 환과고독(鰥寡孤獨)에 처하여 있던 사람들에게 급식을 제공하고 양육보호를 실시하게 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의 ‘고(孤)’는 어리고 부모가 없는 아이들, 즉 고아를 뜻한다.
고려시대에는 974년(성종 13) 고아로서 부양자가 없으면 10세가 될 때까지 관가에서 식량을 공급해 주고, 그 이상의 연령이 되면 본인의 의사에 맡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고아나 걸인아동을 집단수용, 양육하여 사역승(使役僧)으로 하거나 양자녀로 삼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고아들에 대한 구호사업을 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들을 노예 또는 고공(雇工)으로 보내어 평생을 중노동에 시달리게 하는 처사가 많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책을 통하여 수용과 급식제공이 가능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개인의 가정에서 수용, 보호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1661년(현종 2) 이후로는 한성 각부에서 허가에 의한 민가양육이 실시되었고, 1696년(숙종 22) <수양임시사목 收養臨時事目>이 제정, 실시되었다. 1783년(정조 7)에는 이를 더욱 발전시킨 <자휼전칙 字恤典則>이 선포되어 기아(棄兒)나 부랑아를 보호하였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고아보호제도는 1888년 서울 명동천주교회에 고아원을 설립한 것이 시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나라 정부가 세운 것이 아니고 프랑스 신부가 세운 사립시설이었다. 그 뒤 1910년 처음으로 조선총독부에서 제생원(濟生院)이라는 수용시설을 설립하였고, 1944년 <조선구호령>이라는 법령을 제정하여 고아를 구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족항일기 후기에는 일제의 전쟁도발에 따른 극심한 어려움과 혼란스런 사회상황 속에서 고아뿐만 아니라 빈곤아동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와, 사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보호아동 수는 격증되어갔다. 광복 직후 미국 전문가의 내한으로 고아보호사업이 현대화되어 광복 당시 33개였던 고아원이 미군정 초기에는 96개의 고아수용시설과 수용인원이 약 9,000명으로 늘어났다.
6·25전쟁은 많은 전쟁고아와 보호아동을 일시에 대량으로 생겨나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보호대책은 긴급한 국가의 정책과제이며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휴전 당시인 1953년의 아동보호시설 수는 약 440개소, 수용아동 수는 약 5만4000명에 달하였다. 그 밖에도 거리를 배회하는 고아들이 많았고, 그런 상황에 대처하는 응급구호식의 정책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휴전 뒤 10여 년이 지나도 보호시설에 수용된 아동 수는 줄지 않았다. 한편, 1970년대 이후의 요보호아동은 주로 부랑아·기아·미아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의 발생원인은 부모사망, 가정빈곤, 유기, 불량자에 동화, 연고자의 행방불명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전쟁 뒤에 격증된 고아원 수는 점차 줄어드는 반면, 영아원부랑아시설어린이의 집 등 다른 종류의 시설이 증가되고 있다.
과거 전쟁과 같은 국가 위급 시와 경제가 발전하기 이전의 대량 빈곤 시대에 요보호아동의 발생은 불가피하게 증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의 진전과 경제수준의 향상으로 요보호아동의 성격이 변화하여 왔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도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한 이웃의 전통적인 상부상조의 정신이 도시에서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가정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과거와 같이 인척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또한 핵가족구조는 가정불화가 발생했을 때 이를 중재해줄 수단이 없으므로 가정해체로 직결되는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게다가 현대생활의 긴장은 알콜중독자, 정신질환자의 증가 및 부적응, 일탈행동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고 있으며, 산업재해, 교통사고 등의 재해가 증가함으로써 피해가정의 아동들을 그 희생자로 만드는 주요 요인들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편, IMF 경제위기 가운데 가정의 재원이 고갈되면서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도 생겨났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들은 결과적으로 이혼, 별거 등의 가정해체를 유발하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불행한 아동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한편 부모의 사망 또는 행방불명, 폐질 등과 남겨진 다른 부모의 가출로 인해 소년소녀가장이 된 아동들이 현저히 증가하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현대 생활의 긴장과 좌절은 부모의 아동에 대한 학대와 방임으로 이어져 아동들이 가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으며, 젊은층의 자유분방한 생활태도와 성개방 풍조는 혼전 성관계를 증가시키고 자연히 미혼모의 사생아문제를 사회문제로 부각시키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 보육서비스가 양적으로 급속히 팽창되어 보편주의적 서비스를 지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육서비스를 받고 있는 아동은 전체 보육대상아동의 절반수준에 그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1997년의 0∼5세 아동은 4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이 중 184만 명 이상이 취업모의 아동이고, 다시 여기서 한국행동과학연구소의 탁아요구 비율 56.4%를 적용할 경우, 전체 보육대상아동은 104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7년 보육아동 수는 52만 명이고, 보육대상아동을 복지부가 추산한 104만 명으로 파악할 때, 현재 요보호아동의 보육율은 50%에 불과하므로 보육서비스의 보편주의화를 위해서는 시설의 확충과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국내외 양부모와의 결연사업, 가정위탁양육사업, 해외입양사업 등을 확충하여 요보호아동들의 몸과 마음의 보호는 물론, 건전하게 성장, 발달할 수 있는 생활환경을 제공해 주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1980년대 이후 요보호대상 아동의 계속적인 감소로 시설보호아동이 정원에 미달하는 등 기존의 아동복지시설을 재정비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