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인천광역시 민속자료(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우물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우물로 물맛이 좋고 수질이 풍부하여 시민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생명줄과도 같은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특히 인천은 바닷가로 식수문제는 도시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역이었다.
비류(比流)가 미추홀(彌鄒忽)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물이 짜고 토지가 비좁아 수도로서 적합하지 못하였다고 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우물을 발견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라 생각된다. 용동 큰우물은 인천이 한창 번창할 때, 도시 번창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우물 주변에는 인천에서 가장 유명한 양조장이 있어 이 우물물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며, 따라서 그 주변에는 유명한 주가(酒家)들이 형성되어 인천 상권(商圈)의 중심지가 되었었다고 한다.
현재는 ‘昭和 四年 龍洞券藩 六月 修築(소화 4년 용동권번 6월 수축)’이라는 명문이 있는 층계석만 남아 있어, 용동권번이 그 주위에 있었던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또한 권번(기생을 양성하는 학교)에서 이 우물을 관리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각처에서 인천을 찾는 사람들은 이 우물 주변에서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즐겼다고 하는데, 이 큰우물은 오랜 세월을 두고 인천이 발전할 수 있었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곳으로 이 지역 상가의 화려했던 과거를 잘 말해주는 현존하는 유일한 증거물이라 생각된다.
현존하는 용동 큰우물은 원통형 우물로 지름이 2.15m, 깊이가 10m 정도로 우물 위에 6각형 지붕을 설치하여 보존되고 있다. 원래는 자연형 우물이었던 것을 1883년(고종 20) 수리,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우물 내부는 오래된 자연석과 가공된 석축으로 둥글게 축조되어 있고, 상단부에는 콘크리트 원통으로 조성되어 있어 그 역사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게 하며 고풍과 현대적 보수형태가 함께 나타나 보이고 있다.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여섯 모 기둥과 육각형 지붕은 근래에 보수 설치한 것으로 원래는 나무기둥과 목조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단장된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상단에 인천출신 서예가 박세림의 “용동 큰우물”이란 휘호가 걸려 있다. 매년 용동큰우물보존회가 중심이 되어 ‘용동 큰우물 축제’를 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