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군칙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후기 홍경래의 난 당시에 모사로 참여한 주모자. 풍수복설가(風水卜說家).
인물/전통 인물
  • 관련 사건홍경래의 난
  • 사망 연도1812년(순조 12)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776년(영조 52)
  • 출생지평안도 태천현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정석종 (영남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후기 홍경래의 난 당시에 모사로 참여한 주모자. 풍수복설가(風水卜說家).

생애 및 활동사항

평안도 태천현 출신. 가산군 동북면에 살면서 풍수·복설을 생업으로 삼았다.

당시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인 신분 제도의 질곡(桎梏),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횡포 및 관리들의 가렴주구로 피폐한 민생을 구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가, 가산 청룡사(靑龍寺)에서 홍경래를 만나 1811년(순조 11) 반란 모의를 주도하였다.

『관서평란록(關西平亂錄)』에 “홍경래가 모사가 되고 우풍수(禹風水)가 괴수가 되어”라든지 “우군칙은 지혜가 제갈량(諸葛亮)을 앞서고 용강의 홍경래는 재주가 조자룡(趙子龍)보다 낫다.”는 말을 통해, 우군칙의 역할을 짐작하게 한다.

가산의 역속(驛屬) 출신으로 큰 부를 축적한 이희저(李禧著)를 풍수와 복설을 이용해 꾀어,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가산 다복동에 봉기 준비를 위한 거점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인삼 밀매 금지령에 불만을 품은 개성·평양·의주 등지의 거상 부호들도 봉기에 참여시켰다.

한편, 당시 잠채광업(潛採鑛業)이 성행해 각처의 빈민들이 광산촌에 운집해 있음에 착안해, 운산 초대봉 밑에 광산을 열고 노동자를 모아 봉기 때 병사로 동원하였다. 정주성이 함락되자 가족을 데리고 이희저와 함께 도주하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 참수되고 머리는 효수된 뒤 팔도에 돌려 보여졌다.

공초(供招: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말)에 의하면, “얼굴은 철색(鐵色)이며 뺨은 좁고 길며 강파르고, 수염이 갓났으며 누르고, 하관은 빠르며, 눈은 핏발이 서 있고, 5척의 단구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 - 『일성록(日省錄)』

  • - 『순조실록(純祖實錄)』

  • - 『관서평란록(關西平亂錄)』

  • - 「홍경래난과 정주성도」(이병도, 『백산학보』3, 1967)

  • - 「홍경래와 신미변란」(현상윤, 『반도사화와 낙토만주』, 1943 ; 『한국학연구총서』1, 성진문화사, 1971)

  • - 「洪景來叛亂の槪略と其の動機に就いて」 (小田省吾, 『靑丘學叢』8·11, 1932·1933)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