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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때의 문신 · 학자, 정경세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57년에 간행한 시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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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때의 문신 · 학자, 정경세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57년에 간행한 시문집.
서지사항

원집은 권1 · 2에 사(辭) 1편, 시 174수, 권3∼7에 주문(奏文) 2편, 교서 7편, 자첩(咨帖) 8편, 소차 87편, 권8에 의(議) 3편, 계사 14편, 정문(呈文) 8편, 권9∼13에 서(書) 158편, 권14에 잡저 29편, 권15에 서(序) 8편, 기 3편, 발 20편, 권16에 표(表) 6편, 전(箋) 9편, 계(啓) 5편, 격(檄) 2편, 상량문 3편, 축문 7편, 제문 31편, 권17에 비명 7편, 권18에 갈명 10편, 묘표 7편, 권19에 묘지 7편, 권20에 행장 4편이 수록되어 있다.

별집은 권1에 시 36수, 교서 1편, 자첩 6편, 소차 7편, 사장(辭狀) 2편, 계사 3편, 서(書) 19편, 서(序) 2편, 논(論) 1편, 습유 1편, 권2에 사문록(思問錄) 4편, 양정편(養正篇) 3편, 권3에 경연일기, 권4∼7에 저자의 연보, 권8에 언행록, 권9에 묘지명 · 신도비명 · 묘표, 권10에 송준길(宋浚吉)의 행장, 권11에 송시열(宋時烈)의 시장(諡狀), 권12에 사제문 4편, 제문 25편, 만사 22수, 봉안문 1편, 상향축문(常享祝文) 1편, 권말에 하묵의 발문이 있다.

내용

32권 16책. 목판본. 원집 20권 10책은 1657년(효종 8) 처음 간행되었고, 그 뒤 1840년(헌종 6) 우산서원(愚山書院)에서 중간되었다. 1899년 후손 하묵(夏默)이 원집에 별집 12권 6책을 추가하여 32권 16책으로 간행하였다.

저자의 일대는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에 속해 있어서, 이 문집에는 어느 문집보다 역사적 자료가 풍부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소차에는 정치와 국방에 대한 자료들이 많이 보인다.

원집 권3의 <옥당청자강차 玉堂請自强箚>에서는 자강정신(自强精神)의 고취를 강조하면서, 국왕을 포함한 중앙 정부의 확고한 주체 의식과 철저한 전투 태세를 갖출 것을 역설하고 있다. <옥당청수도성차 玉堂請守都城箚>는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도성의 사수를 간청한 것이다. 이 소에서 저자는 국왕이 종전의 모든 의식과 습속을 버리고 직접 제일선에 나가 민중의 선두에 서서 싸워줄 것을 역설하였다.

원집 권4의 <홍문관팔조소 弘文館八條疏>는 국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 먼저 힘써야 할 여덟 가지 항목을 들었다. 첫째 큰 뜻을 세울 것(立大志), 둘째 성학에 힘쓸 것(懋聖學), 셋째 종통을 중요시할 것(重宗統), 넷째 효경을 다할 것(盡孝敬), 다섯째 간쟁을 받아들일 것(納諫諍), 여섯째 시청을 공정하게 할 것(公視聽), 일곱째 궁성을 엄하게 다스릴 것(嚴宮禁), 여덟째 인심을 진정할 것(鎭人心) 등이다.

원집 권5의 <옥당논시무차 玉堂論時務箚>는 자강정신의 바탕 위에서 절용(節用) · 치병(治兵) · 안민(安民)의 세 가지 당면 정책이 시급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절용은 왕과 궁정의 경비를 절약하고 국가 재정을 정상화시키자는 것이다. 치병은 호패법(號牌法)의 실행과 포수만명양성론이다. 안민은 전통적인 민본주의 이념에서 온 일반 이론이 아니라, 16세기 이래 조선왕조의 사회적 동요로 인한 민생의 파탄을 막고, 인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민지상(安民至上)의 정론(正論)을 피력한 것이다.

저자는 특히 안민을 위하여 대동법(大同法)의 장점을 잘 살려나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한편, 양전(量田), 즉 토지 측량을 반드시 실행하여 민부(民賦)의 공평을 기할 것을 아울러 주장하였다. <논답로서차 論答虜書箚>는 우리 나라가 외교 문서에서 너무 저자세를 일삼지 말고 시비곡절을 가려 당당하게 자기를 주장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잡저 중 <이지봉채신록변의 李芝峰采薪錄辨疑>는 저자가 정통 성리학의 견지에서 이수광(李睟光)의 처세 철학 및 수양론에 대한 두 차례에 걸친 논변을 통해 의견 접근을 이룬 것이다. <김사계경서의의변론 金沙溪經書疑義辨論>은 ≪소학≫ · ≪대학≫ · ≪중용≫ · ≪논어≫의 의의(疑義)를 김장생(金長生)과 논변한 것이다.

김장생은 이이(李珥)의 이기원불상리설(理氣元不相離說)을 수용하고 이황(李滉)의 분이기위이물설(分理氣爲二物說)을 부인하였다. 저자는, 이와 기는 본래 일물(一物)이 아닌데 서로 분리되지 않으므로 혼융무간(混融無間)일 뿐이며, ‘무간(無間)’ 두 자를 자세히 보면 이와 기는 이물(二物)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고 하였다. 이이는 분명히 이기가 이물이라고는 여기지 않았을 것이므로, 김장생이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원집 권13의 <답송경보문목 答宋敬甫問目>은 태극과 음양에 관해 송준길(宋浚吉)과 주고받은 문답 형식의 서한이다. 별집 권2의 <사문록>은 ≪주역≫ · ≪예기≫ · ≪의례≫에 관한 저자의 견해를 적어둔 것이다.

원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아울러 전인(前人)의 주소(注疏)에 대해 개정을 가한 것으로 경학에 일정한 공헌을 남겼다. ≪주역≫에 있어서는 ≪역학계몽 易學啓蒙≫ 및 ≪계몽전의 啓蒙傳疑≫에 대해 동양 철학의 기본 문제를 다루면서 적지않은 신설(新說)을 발표하였다.

<양정편>은 ≪향교예집 鄕校禮輯≫의 동자례편(童子禮篇)을 간추려 이를 약간 수정한 것이다. 일상생활의 기거동정(起居動靜)과 규범을 밝히고 있다. 별집 권2의 <경연일기>는 1623년(인조 1) 5월 15일부터 1629년 10월 20일까지 7년 동안 42회에 걸쳐 조강(朝講) · 주강(晝講) · 야대(夜對)를 통해 군신간에 문답한 상세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문답은 경의(經義) 그 자체보다 경의와 관련해서 정치 · 경제 · 군사 · 외교 등 시국 관계의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일기의 내용은 당시 지배층의 사고 방식과 각 지방의 민정 · 풍속 등 조야 전반의 정치적 · 사회적 동향을 숨김없이 잘 전해주고 있다.

<서중문 誓衆文> · <여진잠일향문 與鎭岑一鄕文> · <모량격 募糧檄> · <상김초유성일게 上金招諭誠一啓> 등은 임진왜란 때 의병의 소집, 군량의 조달에 관한 글들이다. <모도독회첩 · 회자 毛都督回帖回咨> · <원군문숭환계첩 袁軍門崇煥揭帖> · <유부총흥치회첩 劉副摠興治回帖> · <답김주첩 答金主帖> 등은 당시 우리 나라의 역사 자료로서뿐 아니라 동아시아, 특히 조(朝) · 명(明) · 청(淸)의 외교 교섭사로서 귀중한 문헌들이다. 규장각도서 · 장서각도서 · 충남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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