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안동 출신.
1919년 2월 15일 경 편항장터에서 유연성(柳淵成)으로부터 전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니 우리도 독립만세를 부르고 관청을 파괴하면 반드시 조국이 독립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흔쾌히 찬성하였다.
3월 15일 유연성·유교희(柳敎熙)·박재식(朴載植)·박진선(朴晉先)·이강욱(李康郁) 등 7명과 함께 편항시장의 공동타작장에 모여 장날인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그 진행방법으로 만일 일본경찰이 제지하면 편항주재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각각 인근지역의 주민들에게 독립만세운동의 취지를 설명하여 동참하게 하기로 하고 자신은 마령동(馬嶺洞)지역을 담당하였다. 3월 21일 오후 2시경 500여 명의 군중이 편항시장에 모이자,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
이 때 주재소에서 두 명의 일본경찰이 출동하여 유연성을 강제로 잡아가자 계획대로 편항주재소로 달려가 유연성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일본경찰이 위협사격을 가하자 동시에 군중들의 분노도 폭발하여 유동수 등의 지휘 아래 투석과 몽둥이로 주재소와 순사의 숙사를 파괴하고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여세를 몰아 임동면사무소까지 행진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와 비품을 파기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잡혀 6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