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문집인 『백주집(白洲集)』 권16에 기재되어 있다. 이명한이 1640년(인조 18) 4월 13일에서 16일까지 금강산의 여러 유명사찰과 주변의 경관을 보고 느낀 점에 대하여 기록한 글이다.
작자는 천하의 명산인 금강산을 중국인들도 한번 보고자 원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출생하여 가보지 못한다면 한이 될 것이라 말하면서 기행문을 시작하고 있다.
이명한은 두 아들과 함께 금성(金城)으로부터 단발령을 따라 금강산에 들어가서 회양과 춘천에서 온 두 관원과 함께 장안사에서 하룻밤을 잔다. 산행의 둘쨋날인 4월 14일에는 아침 일찍 길을 나서 시왕백천동(十王百川洞)을 따라 영원사(靈源寺)와 대소 송라사(松蘿寺)를 찾아보고 표훈사(表訓寺)에서 잠깐 쉰다. 작자는 점심때가 되어 정양사(正陽寺) 동루(東樓)에 앉아 금강산 1만2000봉을 감상하면서 황홀한 시간을 보낸다. 그 때에 평생을 두고 생각해오던 친구들을 만난다.
산행 3일째 되는 날에 산의 안개가 흩어지고 천지가 말끔히 개고 산과 바위가 씻은듯 깨끗하여 산 속의 초목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명한은 이 명산을 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간절한 기원에서 이러한 현상이 비롯되었다고 여긴다. 그 곳의 승려들도 수십년 내의 보기 드문 좋은 날씨라는 것이다.
금강산의 뛰어난 경치를 보고 친구인 인근지방의 3태수들과 함께 유쾌한 놀이를 한 경험이 이명한이 「유풍악산기」를 짓게 된 동기라 할 것이다.
이명한의 「유풍악산기」는 매우 짧다. 그 속에는 간결하면서도 깊은 사색, 인생에 대한 회한과 관조가 드러나 있다. 이것은 자연을 통한 내적 성찰의 한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하겠다. 특히, 이 글의 끝부분에서 산천과 인간, 절후와 시세의 변화를 서로 연결시켜가면서 금강산 구경의 의의를 부각시키고자 한 작자의 의도는 주의를 끌 만하다.